상식적 이해를 위한 성서와 교리 비평/교리
시간이 만들어진 이후에 창조된 피조물들의 특징: 인본주의 창조이야기
YoungSoul's pen
2021. 8. 10. 15:31
창조이야기를 천문학 관점에서가 아니라 종교언어 시각을 갖고 읽으면 창조이야기는 매우 인본적인 글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인본주의는 사람을 중심삼는 사상이다. 그러므로 성경책은 사람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성서는 그 자체로 사람을 위한 글이라는 의미가 된다. 신본주의라는 표현은 매우 좋은 믿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주장될 수 있겠으나 성경책 자체가 인간을 위한 믿음의 글이라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궁창 아래의 물들 모임인 바다와 땅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시간 이전에 만들어진 하늘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다(1절). 천동설적 입장에서 다층구조 관념을 반영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시간 안에서 만들어진 하늘들이 또 있다. 궁창(라키아, 단수)이 만들어지면서 생긴 하늘들이 그것이다. 궁창은 하늘의 물들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다(7절). 그로 인해 시간 안에서 두 하늘들이 생겼다(8절). 이런 이유로 천문학적 관점을 빌어 대기권을 중심으로 공간을 나누는 시각도 생겼다. 하지만 종교언어로 된 창조이야기를 천문학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리모순을 가져온다.
궁창으로 인해 생긴 두 하늘들 중 궁창 아래의 물들이란 바다나 호수처럼 물들이 대량으로 모여 있거나 강물처럼 지표면을 흐르는 물들을 가리킨다(9절). 바다들(얌밈)은 대량의 물이 모여 있는 거대호수도 포함하여 일컬어진 이름이었다(10절). 갈릴리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불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 준다.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자 뭍이 드러났다. 그것이 땅(에레쯔)이다. 이 땅은 시간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1절). 그러다가 물이 한 곳으로 모이면서 바다를 이루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이후 땅은 여러 다양한 각종 식물들이 창조되어 지구에 생명력을 풍성하게 나타내는 삶의 토대가 된다(11절~12절).
시간 이후에 만들어진 피조물들의 특이한 점
여기까지의 과정에서 특이점이 하나 발견된다. 시간 이전에 만들어진 하늘들과 땅에 대해서는 ‘좋았다’는 평이 없었다(1절~2절). 그러나 어둠을 물리쳐 반토막내는 빛이 만들어지자 ‘좋았다’는 평이 있었다(4절). 또 궁창이 만들어지고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짐으로서 이번에는 시간 안에서 또 다른 하늘들이 생겼으나 그에 대해 ‘좋았다’는 평은 없었다(6절~8절).
그런데 셋째 날에는 ‘좋았더라’는 평이 두 번이나 있었다(10절,12절). 한번은 바다와 땅이 구별되어 각각 자기 자리를 찾았을 때이다(10절). 이것은 바다와 땅이라는 ‘존재의 서로 다름, 존재가 구별되는 차이’가 각자의 위치에서 전체적으로 질서와 조화를 이룬 것에 대한 평이다. 서로 다른 존재들의 차이가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함께 있는 것, 같이 있음이 보기에 좋더라는 뜻이다.
다른 한번은 여러 다양한 각종 식물들이 종류대로 만들어졌을 때이다. 여러 차이점들이 서로를 구별하게 만든다. 서로 달라 이것저것이 구별되는 식물들이 지표면 위에 서로 함께 있는 모양새를 가리킨다. 그것은 다양함이 함께 어우러져 나타나는 질서와 조화의 아름다움을 가리키며 동시에 서로 다름이 한 자리에 있다는 것은 생명력의 풍성함을 말해 준다. 풍성한 생명력이 서로 다름이라는 차이와 함께 어우러져 다양함이 하나가 된 모습은 평화로움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지표면에 나타나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서로 다름이 하나로 있는 어우러짐은 생명력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낸다(12절).
시간 이후에 만들어진 지표면 모습의 묘사에 대한 종교적 관념: 인본주의 창조설화
하늘들과 시간 이전의 땅(1절~2절), 그리고 궁창(6절~7절) 등은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종교적으로 천상과 지옥에 관련된 관점에서 사용된다.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적영역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쓰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고대근동의 창조설화들에 의하면 혼돈도 신이고 공허도 신이며 흑암도 신이다.
창조설화들이나 신화들에서 빛은 인간을 위해 기능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극한 어둠에서 갖게 되는 공포나 두려움은 빛으로 인해 사라진다. 빛으로 인해 형체 없음이 형체를 드러낸다. 혼돈이 질서 있게 배열되고 정리된다. 텅 빈 공간이 채워진다. 나아가 빛은 어둠을 밝힐 뿐만이 아니라 열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고대에는 빛을 발산하는 태양을 섬기는 태양신 숭배가 흔했고 빛과 열을 통해 다양한 문화적 진보를 이루게 한 불에 대한 숭배도 있었다.
그 맥락에서 살펴볼 때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는 천상의 존재들로 이해되는 피조체들에 대해 좋다, 나쁘다의 어떤 평가도 내리지 않는다. 그와는 달리 다양한 식물들에 대한 창조이야기는 다분히 지상주의 관점에서 기록된 묘사로 사람을 위한 글임을 알게 해 준다. 이것은 창조설화가 창조주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인간존재의 삶의 입장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직결되는 종교언어임을 스스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위해 신앙적인 관점을 갖고 기록한 종교문학을 가장 성경적인 믿음인양 하나님 중심주의 사고방식을 빌어 사이비 과학언어로 둔갑시키는 문자중심주의 행태가 얼마나 몰상식하고 무지한 짓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 중심주의라는 용어는 얼마나 사람을 위해, 인간세계를 위해 예수의 심정으로 봉사,헌신하는가를 측량할 때나 필요한 개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