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 이해를 위한 성서와 교리 비평/과학성
비과학적인 창조론. 태초에 창조되지 않은 두 가지
YoungSoul's pen
2021. 7. 29. 20:26
태초에 창조되지 않은 채 창조주 하나님들(엘로힘)과 함께 있었던 것: 물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는 우주만물 창조의 과정을 순서대로 기록한 과학적 내용이 아니다. 당시의 천문관을 반영한 종교언어로서 믿음의 글이다. 창조이야기가 믿음으로 읽어야 하는 종교언어로 된 문학이라는 사실은 창조이야기에서 창조되지 않은 피조세계의 존재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
이미 창조주 하나님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었던 ‘물’은 피조세계의 창조와 상관없는 ‘있음’의 존재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현대 과학적 관점으로 창조설을 해석하려는 무모한 수고는 신앙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자세로 변환되어 상식적 성서읽기의 겸손한 자세로 나타나야 한다.
ㅇ2절, 우주창조 이전의 상태
땅은 하늘들과 함께 이미 모든 것들에 앞서서 만들어졌다(1절: 바라, 칼 완료형). 그런데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조된 땅은 미완성인 셈이다(2절). 시간이 지나면서 완성될 것이다. 실제로 “땅이 혼돈했다”는 말은 땅이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아서 무형체(토후, formlessness) 였었다(하예타)는 뜻이다.
제대로 된 형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직 모양이 완전하게 잡히지 않았다는 미완성을 가리킨다. 만들어진 완료상태라면 어떤 모습으로든지 창조가 완료된 형태로 눈에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어떤 모습을 가졌든지 눈에 보인다면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완전한 ‘있음’, 혹은 ‘존재함’이다. 그래서 칠십인 역은 “보이지 않는(아오라토스)”을 통해 땅이 아직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창세기 저자는 ‘땅이 형체가 없다’고 함으로 태초에 하늘들과 함께 만들어진 땅이 제대로 된 완성체가 아님을 말한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들(엘로힘)로 인해 곧 존재하게 될 모든 것들의 “있음”이 완전하게 구비된 완성체, 창조가 완료된 땅이 될 것임을 종교적으로 말하려는 선제적(先制的, preemptive) 표현이다.
“공허했다”는 말은 ‘텅 비어있는 상태’, 곧 “아무 것도 없음(보후, emptiness)”을 가리킨다. 여기서 오늘날의 우주관 개념으로 태양계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텅 비어있는(void) 우주 공간’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으로 고대의 기록을 읽는 잘못된 습관이다. 창세기 저자는 천동설적 세계관의 입장에서 ‘땅’을 주어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태초에 하늘들과 함께 만들어진 땅에 아직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하는 표현이다. 땅이 아직 어떤 형태로든 완전하게 만들어진 상황이 아니기에 ‘아무 것도 없다’는 표현을 더하여 곧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게 될 땅임을 복선으로 말하는 표현이라고 보아야 합리적이다.
“흑암이 깊음의 표면 위에(베호솈 알페네 테홈)”라는 표현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검정색깔과 거리감을 말하는 내용을 통해 태초에 만들어진 땅에 아직 아무 것도 없음을 강조한다. 깜깜하다는 시각적 관념은 아무 것도 없는 빈 공간임을 가리킨다. ‘깊음의 표면 위에’는 표면에서 끝 모를 바닥까지의 거리감(abyss)을 통해 그 어디에라도 아무 것이 없음을 나타낸다. 칠십인 역은 이를 ‘심연의 위에(에파노 테스 아뷔수)’라고 했다.
창세기 저자는 천동설적 세계관에 바탕을 둔 관념 아래에서 땅은 현재 특정의 형태가 없을 뿐만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이기 때문에 미완성체이지만 창조주 하나님들의 창조활동으로 인하여 곧 어떤 무언가로 그득히 채워질 것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
문제는....
그 다음의 표현인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떠다니셨다(메라헤펱 알페네 함마임)”에서 발생한다. “수면 위(에파노 투 휘다토스, over the face of the waters)”라면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물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물은 창조되지 않은 “있음”으로서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들과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하나님들의 영이 그 위에 떠다니고(메라헤펫, hovering) 계셨다는 것은 분명하게도 창조되지 않은 물의 존재를 말해준다.
이에 대해 물은 하늘들과 땅이 창조될 때 같이 창조되었다고 우길 수 없다. 물도 창조되었다는 물 창조 암시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물은 태초부터 창조의 영역 바깥에 있었던 존재로서 창조되지 않은 존재물임을 나타낸다. 앞으로 있게 될 피조물들과는 달리, 창조되지 않은 “태초 이전의 있음”이 물이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물은 생명을 위한 하나님들(엘로힘) 중의 한 존재인 셈이다. 모든 생명체의 처음 존재가 물에서 비롯되었다는 현대의 생명기원설을 뒷받침하는 계시된 문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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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활력을 갖게 한다. 동시에 물은 정화의 도구이다. 더러운 것들을 한꺼번에 닦아낼 때 사용하는 청결의 도구이다. 그래서 물로 침례, 혹은 세례를 받는 종교의례가 만들어졌다. 죄악으로부터의 깨끗해지는 구원의 거룩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처럼 물은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주기도 하며 생명을 거두기도 하는 상징성을 갖는 도구이다.
때를 따라 하늘에서 내리는 물은 온갖 동식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강을 풍성하게 흘러가는 물은 땅 위에 사는 모든 동식물들에게 생명력을 공급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물이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공급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표출하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은 지나치게 많은 물을 일시에 공급하심으로 더러워진 피조세계를 한 번에 말끔하게 청소하시기도 한다. 노아의 대홍수는 바로 그 점을 말한다. 그러므로 물은 생명을 생명 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와 같은 속성을 지닌 물은 하나님 자신이 창조된 피조물이 아닌 것처럼 태초에 창조되지 않은 채 하나님과 같이 있었던 하나님의 도구로 나타난다. 따라서 창조이야기에 따르면 창조되지 않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창조주 하나님 자신들이다. 하나님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창조하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물이다. 물은 태초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세계의 구성품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도구이다. 그 도구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있음으로서의 현존체이지만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창조이야기는 믿음의 관점에서 신앙적으로 읽어야 하는 종교언어로 된 종교문학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창조이야기를 통해 오늘 여기서 받아야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궁구하는 겸손한 태도가 있어야 한다. 그럴 때 복음과 만나게 되는 것이지 일점일획도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운운하면서 성경말씀의 권위를 내세우는 것은 성서적 믿음의 태도가 아니다. 성서는 그러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