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인칭 시점 바이블/성서와 종교적 기능

스러져가는 처지에서 읽는 부활 이야기

YoungSoul's pen 2023. 5. 20. 10:55

스러져가는....[각주:1]

 

어린딸을 살린 아빠
 

복음서들은 회당장 야이로의 어린 딸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생명의 호흡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사42:3,5)에 잇대어져 부활생명을 공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죽어가는 어린 딸의 아빠는 사랑하는 딸이 숨지기 전에 예수께 와서 구원을 요청했다(막5:23; 눅8:42).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일행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어린 딸은 생명의 호흡이 끊어지고 말았다(막5:35; 눅8:49). 

마태복음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아빠는 어린 딸의 호흡이 완전히 끊어졌음을 확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딸을 포기하지 못하는 아빠는 ‘부활의 주’께 구원을 요청했다. 그것은 딸을 살려낸 믿음이 어떤 믿음인지를 보여준다(9:18) 그런데 마태복음에서 어린 딸의 아빠는 회당장 야이로가 아니다. 이름없는 한 관리이다. 이것은 예수 공동체의 영향으로 유대의 생명력없는 율법주의적 조직문화가 변방에서부터 이미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전략적 서술로 여겨진다.

복음서들을 통해 보는 대로 ‘생명살림(막5:41~42; 마9:25; 눅8:54~55)’의 원천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자를 향한 무한사랑에 있다. 바로 그런 사랑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약자를 향해 쏟아질 때 그 약자는 죽어 누워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다는 ‘생명얻음’에 대한 복음이다(막5:42; 마9:25; 눅8:55). ‘살아남’의 사건, ‘생명얻음’의 사건을 발생시키는 ‘살리는 믿음’이란 것은 이처럼 “무한사랑을 실현시키기 위해 예수를 찾는 믿음”이어야 함을 전한다.


선배 고사시키는 작업에 하나된 후배목사들

나는 목사들에게 이런 정도의 인간애를 기대하지 않는다. 사람을 향한 내 인간애 또한 그런 정도의 수준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목사이고 아니고를 떠나 인간적인 입장에서 ‘살리는 성향’을 가진 인간존재들이어야 하지 않겠나.... 할 뿐이다. 

상도교회의 제명당한 교인들과 예배를 드린 지난 8년의 세월 중 마지막 해 끝자락인 2022년 12월 16일자로 감독이 상도교회에 담임자를 직파했다. 며칠 후 그 세월 내내 나와 함께 꼬박꼬박 상도교회의 제명당한 교인들과 예배를 드리던 박ㅇㅇ장로에게서 전화가 왔다.

감독의 직파로 온 목사가 자신을 권사로 칭하면서 ‘왜 남의 교회에 불법적으로 들어와 있느냐’며 면박을 주더라는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명당한 교인들이 권면하여 당회 때에 참석했는데 당회원이 아닌 사람이 왜 여기에 있느냐며 대놓고 무안을 주는 바람에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왔다고 했다.

8년이나 함께 예배드린 18년급 장로에게 ‘남의 교회에서 불법적으로 예배드린 자’라고 말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이어서 아무래도 감리교회를 떠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감리교회 장로가 아니면 어떠냐면서 목사님과는 달리 평신도이기 때문에 교회나 교단을 옮기는 문제는 자유롭지 않겠냐고도 했다.

박ㅇㅇ장로에 따르면, 상도교회의 제명당한 어느 권사가 직파되어 온 목사에게 ‘그 동안 우리와 예배를 드렸던 박목사님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목사는 ‘내 앞에서 그 이름 다시는 꺼내지도 말라’고 단호하게 답했다고 한다. 이어지는 박ㅇㅇ장로의 말에 의하면 그동안 동작지방회에서는 ‘목사님과 자신, 그리고 교회를 없애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고 한다. 이미 자신은 장로직에서 면직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동작지방회의 장로가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말 듣고 화들짝 놀란 나는 행정책임자들과 대면소통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교단의 각 행정책임자들이 후배들로 채워진 상황에서 한 후배 책임자는 대면소통이 필요없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내와 핵심내용을 문자로 주고받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이들에 대해 “살리는 성향의 목사”들이 아니라고 보게 되었다.

상도교회를 매각처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반대했던 교인들을 무자비하게 제명한 ㅁ목사, 그와 동기로서 당시 지방행정을 책임졌던 ㅇ목사와 ㅇ목사, 상도교회에 들어오려고 작업하다가 마침내 그 뜻을 이룬 타신학교 출신 ㅇ목사, 현재 행정책임자 중의 한 명인 ㅇ목사, 이들은 한 선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형성하며 선배목사, 또는 동료목사와 그의 교회, 그리고 18년이나 된 장로를 고사시켜 간단하게 없애는 수순을 밟고 있었다.


제명당한 교인들과 예배드린 것이 왜 불법인가?

교인 한 명 얻기가 매우 힘든 시대에, 목사의 교회매각을 반대하다가 제명당한 교인은 교인이 아니라는 것이 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ㅁ목사와 친분이 있는 그의 동기들 및 선후배뿐만이 아니라 감리회 본부의 최결자(최종결재자) 자리에 있었던 전임 행정책임자들도 한결같이 모두가 동일한 입장이다. 심지어 이사회 때에는 ㅁ목사의 입장을 나서서 지지한 목사들도 있다. 

저들은 제명당한 교인들이 ㅁ목사가 인도하는 예배에 참여하면 그것은 예배를 방해하는 행위가 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실제로 ‘교인도 아닌 사람이 예배를 방해하러 들어와 있다’는 ㅁ목사 말을 들은 후 나가라는 압박에 못 이겨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못했다는 증언이 있다. 여기서 묻게 된다.

1.저들의 주장에 따르면 제명당한 교인은 교인이 아니다. 교인이 아닌 사람이 예배를 드리면 새신자의 자격도 없는 것인가? 그리고 내 입장에서 볼 때, 교인이 아닌 사람들과 예배를 드린 것이 어떻게 법적으로 불법을 행한 소행이 되는 건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의 뇌구조가 그들과 다르기 때문인가? 

2.제명당한 교인들 입장에서 ‘예배도 안 드리는 사람들이 무슨 교인이냐’는 공격에도 대비할 겸, 주일 정규예배를 드려야겠기에 ‘양측은 서로 예배를 방해말라’는 법원판단에 근거하여 자유롭게 예배를 드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것은 장정에 근거가 없으므로 불법행위인가?

3.제명당한 교인들이 나에게 ‘성경공부 인도해 주시고 예배도 인도해 주시라’고 요청했을 때 요청받은 나는 어떻게 했어야 했는가? 제명당한 교인들은 교인이 아니므로 그 제의를 거절했어야 마땅했는가? 


생명을 나누는 살리기 성향이라면?

이에 대한 답은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자명하다. ‘죽이기 성향’을 작동시키면 ‘불법’일 것이고 ‘살리기 성향’이 발동되면 ‘응해야 한다’일 것이다. 그러므로 ‘살리기 성향’을 발동시킨다면 행정은 다음과 같이 조치되었어야 하지 않을까?

박ㅇㅇ목사와 박ㅇㅇ장로 그리고 그 교회는 건물이 없다. 그러나 목사, 장로, 교인이 있는 실체이다. 그러므로 박목사와 박장로는 교회 부담금을 납부하면서 교회로서의 기능발휘에 최선을 다하라.... 이것이 ‘살리는 성향’에서 나오는 행정조치가 아닐까? 그렇지만 그건 내 생각. 

강자의 ‘죽이기 성향’이 발동되면 약자는 그대로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2005년도에 ‘살리는 성향’이 아닌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월세건물과 교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하자 여부와 상관없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미파처리되지 않았던가? 그 후에 ‘살리기 성향’을 지닌 선배에 의해 행정구제 되었었다.

이와는 다르게 나에 관한 한, ‘살리는 성향’을 작동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후배목사들은 교회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을 제명시킨 ㅁ목사의 편에서 선배, 그리고 적지 않은 세월 동안 나와 함께 해 온 박ㅇㅇ장로, 그리고 교회를 없애는 수순에 들어가 있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물같이, 하나님의 공의를 강같이’ 흐르도록 법대로 처리하는 정의로운 목사들이겠다. 

그들은 합법적 제명임을 내세워 교회를 매각처분한 후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자 감리교회를 탈퇴해버린 ㅁ목사와 함께 “살리는 목사”들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8년 전에 벌써 선배목사의 교회를 ‘사고구역’으로 처리해 놓았었다. 그에 따라 나와 박ㅇㅇ 장로는 회원권이 박탈되어 선거권, 피선거권 등이 상실된 상태였다. 사회일반에서 선거권, 피선거권이 8년이나 박탈당할 경우 대체 어떤 죄에 걸려야 하는가? 이렇기 때문에 나는 이들을 가리켜 “살리는 성향의 목사”들이 아니라고 단정하게 된다. 


이단에 빠진 것 같았던 맹신적 목회관 소회

이와 연관하여 개척 전에 담임했던 교회에서의 일을 되새기다가 이 글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두세 명도 아니고 여러 교인들의 카드를 빌려쓰고 갚지 않아 문제를 일으켰던 장로, 청년회장의 할부차를 인도받아 운행하면서 할부금을 갚지 않아 할부금이 밀렸다는 통지를 받게 했던 바로 그 장로, 치리받지 않은 그의 내외는 착하고 충성스럽게 교회를 위해 열심히 헌신하며 봉사하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고 나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어 불법을 행한 자로서 후배들에게 죽어 마땅한 자로 처분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때 나는 일을 저지르고 ‘나 몰라’ 했던 그들 내외에 대해 책임을 물어야 했다. 피해를 입힌 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배상안을 마련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겠거늘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고 ‘살리는 것이 목회’라는 것에 미신적으로 묶여 골골거리다가 오늘에 이르도록 이 모양 이 꼴로 지내게 되었다. 당연히 치리했어야 할 사안을 놔두고 ‘살리는 것이 목회’라는 맹신적 목회관에 젖어 마치 이단에 빠져 이성이 마비된 것처럼 미신적인 행태를 보였던 것에 대한 자연스런 결과일 것이다.

내가 이 모양 이 꼴로 20년 세월을 허송한 것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다. “네 잘못도 아닌데 네가 왜 거기서 나와?”에 대해 유구무언이다. 내가 당하는 고통이 집사람과 아이들에게 전가되고, 그 흔한 학원조차 제대로 보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무한히 밀려오는 아련함....

그런데 후배목사들은 나와 성향이 아주 다르다. ‘나와 완전히 다른 반대방향에서’ 굳이 치리하지 않아도 될, 피해자가 전혀 없는 일에 관하여 아무런 동정심도 없이 불법행위 운운하며 합법적 징계를 내세워 선배목사와 장로, 그리고 그 교회를 조용히 사라지게 해놨다.

얼마 후 박ㅇㅇ장로는 면직된 장로의 직을 살리려면 다른 지방회로 이명하라는 후배의 말을 듣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박ㅇㅇ장로는 그 동안 나와 함께 했던 댓가로 청춘이 심겨진 동작지방회에서 쫓겨나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장로는 내쫓아서 살려놨다. 


스러져가는 현재와 아스라한 소망

그와 다르게 나는 소리없이 사라져야 하는 물안개 신세가 되었다. 행정실무자는 나에게 ‘건물을 얻어 등록해 놓으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은퇴하신 후 은급비가 지급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니 알아보시라’고 했다. 나와 적지 않은 세월을 같이 했던 장로마저 내쫓아버려 사실상 교회가 완전히 해체된 상태에서 은급금에 대해 알아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다시 개척수순을 밟으란 것인가? 그동안 겨우겨우 간신히 붙잡고 있던 한가닥 가느다란 나뭇가지같은 소망마저 부러진 채 지금은 이렇게 서서히 스러져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성서가 전하는 부활 이야기들은 내게 그저 2,000년 전에 수집된 여러 읽을 거리들 중의 한 주제에 불과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지.... 아니면 정말 ‘나도 생명을 다시 얻는 기쁨’을 경험한 부활 이야기가 될지를 기대하면서 아래와 같은 방향성을 갖고 인터넷 활동을 좀 해 보고자 한다.

상식적 성서이해 : 비상식적, 비과학적, 비역사적 내용들에 대한 종교적 신앙적 이해
상식적 믿음생활 : 지난날의 맹신적 목회관을 염두에 둔 상식적 실천행의 믿음
상식적 교리이해 : 종교권력형 교리로 변질되는 이유와 비복음적 교리화의 원인 지적
상식적 교리수정 : 종교권력에 기여하는 비상식적인 교리주의 탈피와 그 대안

  1. 아무런 힘도 없이 서서히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듯한 현재의 내 상황을 나타낸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