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 이해를 위한 성서와 교리 비평/교리 16

예수 믿지 않았던 이순신 장군, 그러나 예수 믿었던 왜국 침략군 중 누가 구원받았을까?

임진왜란 당시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던 이순신 장군, 그리고 수많은 타종교인들, 나아가 이 나라를 지키겠다고 나섰던 불교의 승병들....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을 죽였기에, 더구나 불교의 승려들은 살생금지 계율을 어기고 사람을 죽였기에 구원받지 못하고 지금 지옥불에 던져진 채 고통받고 있는 중일까? 임진왜란 당시 침략자 쪽바리 왜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휘하 장수들 및 병사들 중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부터 신부들이 들어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심어졌던 관계로 예수를 믿는 천주교 신자들이 아주 많았었다. 그런데 그들이 포르투갈과 스페인과의 교역으로 인해 얻게 된 조총을 들고 이 나라를 침략해 왔다가, 예수를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았던 이순신 ..

칼빈의 이중 예정론이 강자논리로 만든 비성서적 반신학적 교리인 이유

∎일단 한번 결정된 하나님의 뜻은 수정되지 않는가? 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변함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결정되면 수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칼빈의 주장이다. 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워지는 근거구절은 다음과 같다. ㅇ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후회가 없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절대 후회하지 않으신다(삼상 15:29). ㅇ야웨는 맹세하신 후에 변하지 아니하실 것이라(시110:4).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의 회개.... 하나님이 회개한다고 되어 있다 분명히! 이에 대해서는 근거라고 할 것도 없다. 하나님도 일단 한 번 결정한 후에 뒤늦게 후회하거나 수정한다는 의미의 구절이 한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ㅇ하나님이 하는 회개 창6:6,7; 출32:12,14; 민23:19; 신32:3..

성서영감설의 오류 :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순서가 맞나?

ㅇ 노아의 아들들 순서는 셈,함,야벳의 순서인가? 노아의 아들은 셋이다. 셈,함,야벳. 그렇다면 셈이 맏아들이고 함이 둘째이며 야벳이 막내라는 순서가 된다(창5:32; 6:10; 7:13; 9:18; 10:1; 대상1:4).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의 9:24와 10:21에 따르면 이 순서가 뒤집어진다. 번역본들보다 그 가치가 우선되는 히브리어 본문은 함을 막내아들로, 야벳을 맏형으로 표현했다. 이에 대해 9:24를 가감없이 솔직하게 번역한 루터역은 jüngster로 영어역은 youngest로 나타냈다. CEV When Noah woke up and learned what his youngest son had done, NAB When Noah woke up from his drunkenness and le..

종교업자 부류들의 교리화된 암송식 부활관의 오류들에 대한 교정적 반론

성서와 교리 상식적 이해라는 유툽 콘텐츠에 달렸다가 사라진 어느 방문자를 통해 본 종교업 부류들이 2,000년 동안 가르치고 있는 비성경적 교리신학의 부활관에 대한 반론 출처: 성서와 교리 상식적 이해 글자본 영상 수정 ∎예수님 신성은 저 같은 성마른 인간에서 오인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 오늘날까지 2,000년을 지나오면서 기독교인을 통해 예수의 신성이 나타나 보인 적은 별로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을 통해 신성을 지닌 예수를 못 보는 것은 당연하다. 결코 당신같은 사람을 통해 예수의 신성을 못 보는 것을 일컬어 오인이라 하지 않는다. 유명한 말이 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는 좋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정말 싫다.” 이 대목에서 주의하라. 성경을 내세우는 자들의 일상생활에 비성경적, 반성서적인 예수가..

성경으로 쉽게 증명되는 예수 부활사건의 창작성과 연관 교리의 부당성

성경본문을 일일이 거론한다거나 복음서들의 부활사건 내용을 비교 검토해 볼 것도 없다. 그저 예수의 부활사건을 기록한 성경의 본문들이 같은지 다른지만 확인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와 같은 단순 작업만으로도 성경의 예수부활 사건은 서로 다른 복음서 저자들의 창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데 충분하기 때문이다. 부활사건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한 사건에 대한 복음서 저자들의 서로 다른 문필적 차이일까? 만일 그렇다면 내용에는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종교업자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복음서들이 기록한 각각의 부활사건 내용들은 전후 문맥을 비롯하여 내용마저 서로 다르다!. 그러니 당신의 주장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려면 부활사건을 기록한 복음서 본문들을 서로 대조 비교하면서 주의 깊게 읽어보라 좀...

삼일 만의 예수부활 정말 맞나? - 예수 졸도설 시각과 관련하여

사흘 만의 예수부활. 그 허구성과 졸도설 이 글은 특정 집단을 향한 질문으로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경칭을 자제한다. 바른 믿음, 정통 믿음,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들의 믿음 양태에 대해 이단운운하는 자들이 아직도 널려 있는 모양이다. 오직 자신만이 성경에 충실한 것처럼 스스로 자충수를 두어가면서 성경의 불일치, 모순, 오류, 부정확 등을 호도하며 합리화하려고 무던히도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이다. 바른 믿음, 정통 믿음, 성경대로 믿는 믿음을 강조하는 그 자체가 의심스럽기 그지 없다. 그래서 자신들은 오직 성경의 말씀만을 중심 삼는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자신의 생각과 다른 신학사상, 견해, 시각 혹은 관점을 갖고 있는 상대방을 못 견뎌하는 자들에게 물어본다. 스스로 대답해 보라...

동성애자도 마음놓고 편히 예배드리는 교회.한국에 아직 없겠지?

의미없이 사용되는 색은 없다 히브리 정경에서 보는 대로 성막건조용 물품들 중에는 색이 강조되는 예물이 있다. 거기서 색채신학이라는 시각을 갖고 회막공동체를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색채신학 교회론"을 말할 수 있다. 출25:4~5는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지은 이동식 성소에 어떤 색깔들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용된 색상은 네 가지로 청색, 자색, 홍색, 적색이다. 홍색도 빨강이고 적색도 빨강이지만 홍색은 밝고 선명한 색상이며 진홍색이라고 표현될 때에는 밝음의 정도가 높고 선명도가 높은 빨간색을 나타낸다. 새빨간색이라고 강조될 수 있다. 연분홍이라고 말할 때의 홍색은 밝은 빨강이지만 하얀색으로 인해 빨간색이 약해진 빨강을 가리킨다. 적색은 이와 달리 통상 검붉다고 표현되는 짙은 빨간색으로..

두 개의 창조 이야기에서 보는 히브리 정경의 의도

창1장과 창2장의 창조이야기가 보이는 차이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창1장은 다신교 시각으로 보아야 자연스러운 복수형태의 창조주들인 엘로힘이 등장한다. 엘로힘(복수의 하나님들)은 엘(단수의 한 하나님)의 복수형태이므로 창1장의 창조주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말하는 한 분 절대자 유일신 야웨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복수의 여러 하나님들(엘로힘)이다. 복수형태의 엘로힘이 창2장에서는 단수의 한 하나님으로 바뀐다. 엘로힘들 중의 한 엘, 곧 야웨라는 이름을 가진 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창1장의 다신론 관점이 일신론 관점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창2장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된 “야웨 엘로힘”이라는 표현은 “엘로힘 중..

창조이야기에서 보는 신정론의 오류와 무의미성

∎신정론의 전제가 잘못되었다. 신정론의 핵심은 이렇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왜 악, 이유없는 고난을 허용하는가?’ 여기서 두 가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회의적인 이의가 제기된다. 1. 악, 이유 없는 고난이 현존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혀 전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닌가? 전능한 하나님이 왜 이유없는 고난을 제거하지 못하는가? 2. 악, 이유 없는 고난이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전혀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닌가?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부당하고 억울하며 설명도 되지 않는 악, 고난이 횡행하게 하는가? 이와 같은 내용의 신정론 질문은 창조이야기의 관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정론이 제기하는 질문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이 출발하는 전제가 잘못되었으므로 신정론 관련..

종교의 신관도 바뀌어야 그 종교가 살아남게 된다.

창세기 1장과 2장의 ‘달라진 하나님 칭호’에서 보는 신관 변화의 의미 종교는 인간 삶을 구성하는 여러 DNA 중 한 요소이다. 역사에서 보는 대로 숱한 여러 종교단체들이 생성소멸해 왔다. 그러나 종교자체는 인간존재의 삶을 이루는 DNA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인간의 종교심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종교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시대의 조류에 맞춰 종교도 자신을 바꿔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그것을 적확(的確)하게 보이는 가장 적절한 예가 히브리 정경에 나타나는 신관의 변화이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하나님은 말씀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는 등의 신 정체 묘사가 시대의 흐름에 따르는 신관의 변화를 대변해 주고 있다. 신관이 바뀐다는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