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주의만찬(고전11:17~29)’ 관점에서 본
사람 차별하는 성찬식과 강자논리 성찬론 비평
이 글은
바울이 가리켜 말한 고린도교회의
'주의만찬'에 대한 해석의 시각을 바탕으로
교회사 속의 성찬식과 성찬론을 비평하면서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글이다.
Ⅰ. 시작하며 꺼내는 말 - 사람을 차별하는 성찬식
복음서에 나타나는 최후의 만찬(막14:22~25; 마26:26~29; 눅22:15~20)과 바울이 주께 받아 고린도교회에 전한 식사(고전11:23~25)는 같은 식사로 복음서에서 보는 최후의 만찬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일반형태의 보통식사이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음식을 먹는 일상에서의 식사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교회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예배 중에 시행되고 있는 성찬예식은 거기에 아무리 신적인 의미를 부여할지라도 ‘생명을 얻게 하는 음식나누어 먹기’와 전혀 무관한 허례허식의 종교예전일 뿐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원천적으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행위에 신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식사행위를 거룩한 종교예전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특정의 사람들이 제외되는 식사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구원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교회 안에서는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예전을 통해 사람을 차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말씀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에 특정의 자격을 갖춘 사람들만 모여, 그것도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전혀 상관도 없는 음식먹기 의식을 성찬식이라는 이름으로 시행하는 것은 매우 비신앙적이며 비성서적인 비논리이다. 왜 성찬식 때 일단의 사람들이 제외되어야 하는가? 왜 배고픔을 해결하는 음식먹기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종교예전을 시행하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교제와 목회-선교신학적 기능을 무력화시키는가?
더구나 복음의 대상자들은 구원의 은총 안에서 누구든지 동등하다. 그러므로 복음의 수혜자로서 만인을 평등하게 대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종교예전을 시행하는 중에 사람을, 그것도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을 차별하는 행태는 없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교회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관습적으로 시행되어 오고 있는 성찬식은 무수한 세월 속에서 복음의 수혜자들을 둘로 쪼개어 나누는 차별행태를 중단하지 않고 있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인간들은, 인간이 만든 종교단체의 종교예전에 특정의 사람들을 참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반신앙적인 교회 내 차별행태를 자연스럽게 자행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을 차별하는 성찬예식이 진정으로 구원의 대상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을 보편적으로 나누는 복음전파의 행위인가?
이에 대해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어우러졌던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아들이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지금까지 그리스도교회가 시행하고 있는 성찬예식이 얼마나 일단의 사람들을 냉대하는 차별적 종교예전인지를 지적하면서 지금도 하나되지 못한 채 각각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주장하는, 객관적으로 전혀 와 닿지 않는 비상식적 강자논리일 뿐인 성찬론의 비논리성과 무의미성을 적시한 후 그에 대한 대안적 의견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연관논문과의 중복내용 생략
4. 바울의 ‘주의만찬’ 관점에서 본 사람 차별하는 성찬식과 강자논리 성찬론 비평
이와 같이 추론될 수 있는 바울의 입장을 염두에 두고 교회사 속에서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는 성찬식을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반신학적 비논리, 비상식적인 비신앙이 드러난다.
바울에 따르면 바로 그 교회의 식사자리에서 음식을 서로 나눌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념되면서 동시에 예수의 죽으심이 전해지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맥락에서 사람이 차별당하는 행태는 절대 나타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의 식사자리에서 차별행태가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다(21절~22절). 그래서 바울은 그로 인한 갈등이 교인들 간에 발생하는 분쟁과 파당이라는 고착화된 상황으로 확장되어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입장에서 주께 받은 만찬전승을 고린도교회에 전했다.
이와 같은 바울의 관점에서 현재 그리스도교회에서 시행되는 성찬식을 보면 매우 비성서적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성찬식은 지난날 교회사 속에서 만들어진 지극히 인위적인 종교제도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더구나 교회에서는 사람차별 행태로 인해 교인들 간에 갈등이 촉발되고 그것이 교회의 분쟁과 파당현상으로 이어지면 안 된다는 것이 바울의 핵심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교회사 속에서 발생한 성찬식 논쟁은 반바울적으로 변질된 비성서적인 강자논리성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하여 수세기 전의 종교강자들 사이에 갈등만 증폭되었고 결국 영원히 화해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교회는 성찬식을 거룩한 예전 중 하나라고 주장하면서도 구원의 복음을 반토막내고 나아가 구원의 대상자를 상대로 구원의 복음을 반쪽짜리 복음으로 만들어 왔다. 그에 따라 아직도 현재 진행 중에 있는 대표적인 사람차별 행태현상을 적시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1) 세례받은 사람만 참여하는 성찬식
일단의 개신교회 중에는 성찬식을 시행하면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 세례를 받았거나 받지 않았거나 세례여부와 상관없이 예배 참석자 모두를 상대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교회가 없지 않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성찬식을 중시하는 칼빈파 보수주의 교회, 루터교회, 그리고 성공회와 카톨릭 교회처럼 종교의 외형적 형식을 중요시하는 교파들은 세례받은 사람만 성찬식에 참여하여 주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다는 규정을 실행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진중하게 예배나 미사를 드렸어도 세례받지 않았거나 아직 세례받지 못한 사람은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다. 심지어 교파가 다른 곳에서 세례를 받았어도 자신들의 교파에서 시행하는 성찬식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금령을 두고 있다. 그에 따라 그들은 예배나 미사에 참석했다가 성찬식이 시행되면 그대로 자리에 앉은 채 빵과 포도주를 먹는 다른 사람들을 구경만 하게 된다.
이런 현상은 대체 성찬식이 무엇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졌기에 발생하는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과연 성경대로 해야 한다는 그리스도교회는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가? 죄인을 위해 희생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말로만, 귀로만 들어야 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인가? 2,000년이 지나도록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살이 찢기고 피가 터진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나누는 성찬예식 때에 세례를 받고 안 받고를 기준선으로 동등한 영혼의 소유자인 사람을 예배 장소에서 이렇게 차별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래서 구원의 복음이 갖는 신학적, 신앙적 정신의 측면에서 볼 때 성찬식은 백해무익한 허례허식이라고 규정짓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바울의 목회-선교신학적 관점과도 동떨어지는 종교예전으로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매우 인위적인 제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제도로 인해 교인들의 입에 빵과 포도주를 가져다대는 신부나 목사들의 종교적 권위는 추락하지 않고 고양되는 장점이 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신부나 목사를 경멸할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전한 만찬전승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성찬식이 진정으로 성서적인 의미에 충실한 성찬이려면 과연 어떻게 시행되어야 하는가를 목회-선교신학적 측면에서 볼 경우, 교회사를 통해 지금도 여전히 권위가 주어지고 있는 신령한 제도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된 현재형태의 성찬식은 아무 소용이 없는 무의미한 종교제도로 남아있을 뿐이라고 규정하게 된다.
개신교회 측은 세례와 성찬식, 이 두 가지만 성례로 인정한다. 그에 따라 개신교회의 성찬식은 종교제도로서 매우 막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 수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개신교회의 교리로 확인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회의 목회현장에서 종교예전으로서의 성찬식은 현실적으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기는 카톨릭이나 성공회 등의 모든 종교예전도 마찬가지이다.
2) 성찬식에서 원천적으로 제외되는 세례 받지 못한 열두 살 이하 어린이
한편 인위적인 종교제도로서의 성찬식에 의해 원천적으로 차별을 받는 또 다른 부류가 성인예배와 별도로 예배를 드리는 열두 살 이하 어린이들이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의 활동에 의하면 열두 살짜리 어린이도 다시 살아나는 은총을 경험했다(막5:42; 눅8:42). 그런데 오직 성경말씀대로 한다는 루터 이후의 개신교회 역시 카톨릭과 별로 다를 것 없이 부활하신 주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성찬식에서 열두 살 이하 어린이를 원천적으로 배제시키고 있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가? 열두 살 이하 어린이는 아무리 먹어봐야 배고픔이 해결되지도 않는 성찬예식 때의 빵과 포도주를 먹어보기는커녕 성찬식이 진행되는 모습조차 구경도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세례받지 못한 열두 살 어린생명들은 교회사를 통해 원천적으로 차별당해 왔다.
어린이 주일날 성인예배 포기하고 어린이들만을 위한 성찬예식을 시행하는 신부나 목사가 이 땅에 있는가? 아니면 어린이 주일날 부모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같이 성찬예식에 참여케 하는 교회가 있는가? 단도직입적으로 적시하여 말하건대, 예수 부활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교회사를 통해 그렇게 교리와 상관없이 어린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종교예전을 집행한 신부나 목사가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지금까지 없다. 아마 한국 땅에서는 앞으로도 여전히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이래도 교회사 속에서 근거 없이 상황적으로 만들어진 성찬예전이 성경적일 수 있는가? 교회사 속의 힘 있는 자들이 만든 성찬론이 성서적으로 근거가 반듯한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앙적인 교리인가?
열두 살 이하의 어린이를 상대로 성찬식을 시행한다면 그것은 근거도 없이 만들어진 성찬교리 위배에 더하여 지금까지 하지 않았던 종교관습을 위반하는 것까지 겹쳐지는 일로 지적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열두 살 이하의 세례받지 못한 어린이들을 상대로 성찬식을 시행한다면 그것은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온갖 이단적 행태를 스스로 자원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뿐이다. 더구나 어린이를 상대로 그렇게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교회조직의 운영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선이해가 작동하기 때문에 어린이를 상대로 하는 성찬예전에 대해서는 적절한 이유를 찾는 것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나라는 출생하는 아동수도 급감하는 상태이다. 교회사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성찬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례를 못 받은 어린이들은 원천적으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 같은 모양새가 사라져야 한다. 종교제도권 밖으로 몰아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어린 영혼 구원해야 한다면서 어린이 전도를 외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왜 비논리적인 교리와 비신앙적인 반쪽 복음으로 열두 살 이하 어린이 영혼은 성찬에서 제외시키는가?
분명하고도 명확한 것은 예배 중에 시행하는 성찬식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찬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종교단체를 조직 운용하는 입장에서 인위적으로 만든 교회사 속의 종교제도일 뿐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목회-선교신학적 차원에서의 참 성찬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서적, 복음적, 선교신학적 성찬은 배고픔을 해결하는 중에 예수의 죽으심이 전해지는 식사이다.
그러므로 어린이에 대한 전도와 어린영혼에 대한 목회적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는 목회자들은 이제 나서서 어린이 대상 성찬예식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보길 권해 본다. 먹는 흉내만 내고 끝나는 종교예전이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하는 식사자리에서 예수의 죽으심이 전해지며 그 의미가 공유되는 목회-선교신학적 관점에서의 성찬이 어린이를 상대로 시행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3) 사망 직전의 환자들을 상대로 베풀어지는 약식세례와 성찬식
사망하기 직전에 있는 환자를 설득하여 약식세례를 받게 한 후 곧 이어 간단히 축약된 또 다른 형태의 성찬식을 병상의 환자에게 시행하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가? 위에서 기술한 두 경우와는 달리 이것은 목회자에게 있어서 매우 뜻깊고 의미있는 신앙적, 복음적, 목회적, 신학적인 목양활동의 한 분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종교라는 것이 변치 않는 복음전도 구호이다.
그와 같은 시각에서 볼 때 병상의 환자를 상대로 시행하는 약식성례로서의 세례와 성찬식은 매우 의미심장한 종교예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육신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지만 병상의 환자를 위로하는 경험적 격려와 병상의 환자로 하여금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갖고 임박해 있는 죽음을 자연스럽게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종교적, 목양적 배려는 생명의 구원을 위한 목양활동의 한 부분이기에 매우 성서적인 목양활동의 일면이라고 판단한다.
더구나 병상의 환자를 위한 성례는 사망 직전에 있는 환자만이 아니라 그 환자와 혈연적으로 매우 가까운 식구들의 믿음과 영적 건강에도 매우 좋은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는 일반적인 식사와 전혀 무관한 병상의 환자를 위한 약식형태의 성찬은 목양활동의 특화된 예외로 활용함이 매우 유익하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순수목양 차원에서 행해지는 종교의례로서의 성찬식 이외에 교회에서 행해지는 비논리적, 비신앙적, 반신학적 성찬식은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무의미한 제도이며 그것은 단지 종교단체의 현재상황을 유지시키는 현상유지용 제도일 뿐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현재에도 그리스도교 각 교파 안에서 시행되는 성찬식이 사람을 근본적으로 차별하는 반복음적 행태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5. 간단히 핵심만 지적하는 성찬론 비판
참조 영상
1) 카톨릭의 화체설
이 논리에 따르면 성찬식 때의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주의 살과 피로 변한다.’ 복음서의 표현과 거기서 받는 인상에 따라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이다' 했으므로 빵과 포도주가 실제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것이 화체설의 요지이다. 이에 대해 그 어떤 논리를 제시하며 반론을 제기해도 강자의 주장이기에 요지부동이다. 인용되는 성구에 대한 비지성적 입장은 천동설을 포기하지 않고 지탱했던 뚝심 그 이상으로 여전하다.
이 화체설 논리에 의하면 성찬식 때에 신도들이 먹는 빵과 포도주는 주의 실제 살과 실제 피이다. 따라서 매주 시행되는 성찬식에 참여하여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먹는 카톨릭과 성공회 등의 신자들은 매주 성찬식 때마다 예수의 실제 살과 실제 피를 먹는 식인예전을 시행하는 셈이다.
2) 루터파의 공재설
이 논리는 카톨릭의 화체설을 지나 한걸음 더 나아간다. 성찬식 때의 빵과 포도주 안에, 아래에, 함께 부활의 주가 임재한다는 루터의 주장이 지금도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카톨릭과 달리 전세계 루터의 후예들인 루터교 신자들은 매주 시행되는 성찬식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째로 삼켜버리는 예전을 시행하는 모양새를 이루는 셈이다. 빵과 포도주 안에, 아래에, 함께 실재하는 주이기 때문에 화체설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빵과 포도주는 주의 살과 피의 일부가 아니다. 예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성서"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카톨릭에 반기를 들었던 루터의 성찬식은 화체설을 여유롭게 압도한다고 할 수 있다. 루터의 공재설에 입각한 성찬식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정도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 안에, 아래에, 함께 실존하는 예수 자신을 통으로 먹는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3) 칼빈파의 영적 임재설
칼빈은 자신의 주장보다 앞서 제시된 이론들을 대하면서 이 논리 저 논리 다 빠진 후에 마지막으로 정리된 자신의 영적 임재설을 내놓았다. 그러나 가르치는 입장에서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한다고 할지라도 배우는 입장에서 들을 때 그 내용은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매우 추상적인 이론이다. 아무리 쉽게 이해하려고 해도 현대인의 과학상식에 비추어 볼 때 화체설이나 공재설보다 더 이해하기가 어려운 납득불가의 궤변 수준이다.
교육을 받는 신도의 입장에서는 목사들이 가르치는 그대로 그저 그렇다고 되새길 뿐이다. 종교강자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라는 차원에서 칼빈의 영적 임재설은 반복하여 암기될 뿐이며 교인들의 입을 통해 그렇다고 기술될 뿐이다. 영적 임재설과 관련하여 그 내용을 설명하는 지점에서 그것이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것에 상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강자가 제시하면서 논술한 종교이론일 뿐이므로 배워 익혀야 하는 교인들은 또 다른 신앙고백적 진술처럼 가르침을 빙자하여 주입시킨 그대로 주입받은 내용을 시인하여 진술하면 된다. 화체설, 공재설, 쯔빙글리의 기념설 등을 이리저리 빠지면서 매우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논리이기 때문에 내용에 대해서는 이해할 필요가 없다. 목사들이 가르치면 그런가 보다 하고 있다가 잊으면 그 후에 다시 반복교육으로 되새기면 되는 성찬론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4) 가장 상식적이며 성서에 가까운 쯔빙글리의 상징설, 혹은 기념설
인간의 지성은 옛 시대나 지금 시대나 별다른 차이가 없다. 쯔빙글리는 벌써 저 시대에 종교강자들의 막강한 세력이 앞에 진을 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부여된 인간의 보편지성에 바탕을 둔 이론을 제시했다. 시간이 수백 년 흐른 지금 칼빈파나 루터파, 나아가 성공회나 카톨릭도 자신들이 시행하는 성찬식이 자신들이 제기하는 이론에 상응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면서 자신들이 교육시키는 이론에 맞게 그 의미가 경험되고 있다고 보는가?
아니다. 다만 이론적으로 반복되는 성찬론만이 별다른 의미없이 되새김질 될 뿐이다. 실제의 생활현장에서는 카톨릭이든 개신교회이든 신자들 모두는 각각 쯔빙글리의 기념설 개념 수준에서 자신들의 성찬식을 받아들이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렇기에 성찬론은 종교강자의 강압성 주장이 아니었을 경우 벌써 오래 전에 교회사 속에서 소멸되었을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이다.
교회사 속의 강자논리성 성찬론과 관련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적으로 어렵지 않게 누구나 상식선에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논리를 하나 선택하라면 쯔빙글리의 기념설 혹은 상징설을 들게 된다. 인간의 보편적 상식선에서 관조할 때 신약성서 저자들의 입장에 가장 가까울 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경험적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약성서 본문들 중 역사적 예수에 가장 가까운 시점에서 기록된 고전11:24,25에서 바울은 ‘나를 기념하라’고 표현된 예수의 말씀을 전했다. 바울은 자신이 주께 받은 만찬전승을 고린도교회에 전해 주면서 ‘나를 기념하라(εἰς τὴν ἐμὴν ἀνάμνησιν)’는 예수의 말씀을 함께 전했다. 이 표현을 문법에 충실하여 직역하면 ‘나를 기억함에로’이다. 이때 ‘나를 기념하라(ἀνάμνησιν)’는 표현은 영어역에서 ‘in remembrance of Me’로 번역된다. 이에 대한 독어역 성서들은 ‘zu meinem Gedächtnis’라고 번역하는데 이는 루터역도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마가복음이나 마태복음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으나 바울 이후에 기록된 누가복음도 명확하게 ‘나를 기념하라’는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바울이 사용한 어휘와 완전히 일치한다. 그렇다면 성서저자들은 모두 ‘기념설’ 개념을 갖고 있었다고 단정적으로 확언할 수 있다.
성서본문상의 표현이 이렇기 때문에 바울이나 누가복음 저자는 교회사 속에서 벌어졌던 화체설이니 공재설이니 영적 임재설이니 하는 따위의 추상적인 논쟁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쯔빙글리가 제시하는 보편적 상식선에서 부활의 주를 추억, 회상하는 기념설 개념을 전하고 있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따라서 교회사 속의 성찬론이란 것은 그저 종교강자의 위치를 선점하려는 목적을 갖고 자웅을 겨루기 위해 펼친 종교강자들의 비논리적인 다툼이었을 뿐이라는 것에서 실소만 지어진다.
상황적으로 이러한데도 종교조직의 테두리 안에서 각각의 이론들이 아직까지도 살아남아 그 추종자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주입되고 있다. 정작 신도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성찬식에 참여하여 신부나 목사가 나눠주는 빵조각도 아닌 것을 주의 살로, 한모금도 안 되는 포도주나 포도즙을 주의 피라고 생각하도록 교육받고 교회에서 시행하는 예전이기에 참여하는 정도일 뿐이다.
이와 같은 무의미한 종교제도가 형식적으로 반복되는 율법주의적 관행에서 벗어나 작금의 성찬식에서 일단의 사람들이 배제되는 등의 차별행태가 완전히 사라지고 주의 죽으심이 전해지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성찬으로 자리매김 되는 식탁교제가 시행되려면 바울이 제시하는 공동식사의 의미가 식사자리에서 제대로 구현되도록 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된다.
Ⅲ. 마감하면서 제시하는 말
1. 식탁선교의 장(場)으로 기능해야 하는 주의만찬과 식사교제
바울은 교회의 공동식사가 선교적 기능을 시행하는 ‘주의만찬’이 되어야 한다는 그의 목회적 관심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부각시켰다. 1 그것이 교회의 공동식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주의만찬장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가르침으로 나타났다. 2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교회공동체의 결속에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럴 때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사회일반의 식사와 구별되는 식사로 특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에서의 공동식사는 사회일반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각별한 경험이 나누어져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고린도교회의 ‘주의만찬’은 예배 중에 약식형태로 시행된 성찬식이 아니었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먹는 식사자리에서 주의 죽으심이 전해져야 거룩한 식사라고 칭해지는 식사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과 연계된 공동식사였다. 3 그런데 그 식사자리에서 교인들 사이에 분쟁과 파당의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리고 교회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모양새가 연출된다면, 교인들은 그런 식사자리에 다른 사람들을 초청할 수도 없거니와 그 자리에 다른 사람들이 초청되어 올 수도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공동식사 자리에서 분쟁과 파당의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공동식사 자리는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식탁이 될 수 없다. 4 따라서 교회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잔을 나누는 교인들은 서로 한 몸을 이루는 하나 된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자각함으로서 ‘주의만찬’이라고 명명된 공동식사 자리가 다른 사람을 향한 선교의 장이 되게 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입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2. 식탁이 곧 선교의 장(場)이 되어야 하는 식사교제로서의 주의만찬
이와 같은 흐름에서 볼 때 고린도교회의 공동식사가 ‘주의만찬(κυριακὸν δεῖπνον)이라고 불린 이유가 무엇인지를 요약하여 정리할 수 있다. 교회의 공동식사는 서로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식탁에 올라온 동일 음식을 같이 나누는 평등한 자리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 것으로 마쳐지는 식사자리가 되면 안 된다. 6 교회에서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망자 예수를 추억하면서 기념하기 위해 약간의 음식을 형식적으로 나누는 종교의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공동식사는 주의 죽으심이 전해지는 선교적 기능이 수행되도록 해야 한다. 7 바울은 그런 기능을 해야 할 고린도교회의 공동식사를 가리켜서 ‘주의만찬(κυριακὸν δεῖπνον)’이라고 명명했다. 교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현재적 분쟁과 파당의 현상을 해결하려고 주께 받아 전한 만찬전승을 고린도교회의 공동식사와 연계시켜서 주의 죽으심이 전해져야 하는 “식탁선교용 교훈”으로 주었다.
그렇기에 교회사 속에서 만들어진 현재형태의 성찬식은 원천적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인위적인 허례허식적 종교예전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 주의 죽으심이 전해지는 거룩한 식사, 성찬이라고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참다운 의미에서의 신학적 성찬, 성서적 의미에서의 복음적 성찬이란 것은 생활 속에서 발생하는 실제상황의 ‘식탁교제를 통해 주의 죽으심이 전해지는 목회적 선교형의 식사자리여야 한다’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장 보편적인 지성적 상식선에서 가능한 성서적인 성찬을 교회에서 시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음식을 먹으면서 전하는 예수의 죽으심"이 가능케 되도록 온갖 머리를 짜내어 방안을 마련해야만 한다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물론 그에 따른 교인교육도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때 가장 바람직한 교회상이 만들어진다. 가정 같은 교회....
그러나 이것은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하길 원하는(요14:12 참조) 종교권력적 욕심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이상적인 그림일 뿐이다. 하지만 입으로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교회는 날마다 개혁되어야 한다는 마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최소한 먹는 흉내를 내는 예전을 시행하면서 사람을 차별하는 행태만이라도 제거시키는 것이 성서에 바짝 다가서려고 애쓰는 인간 쪽의 수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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