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사실기록이 아니라 종교적 교훈을 담아 전하는 역사소설로서의 단편 종교문학
ㅇ룻의 전남편은 형인가 아우인가? 룻은 맏며느일까 둘째 며느리일까?
이 문제는 그다지 중요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룻이라는 여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그 여인의 생애가 다윗계보와 연계되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다는 가당치도 않은 성서영감설에 묶여 룻기는 정확무오한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 그 자체라고 이해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성서가 그렇듯이 룻기는 역사서가 아니라 역사를 배경삼아 기록된 종교문학으로서 단편 역사소설이다. 부인하기 어렵게도 아무리 맹골수 보수주의자라고 할지라도 성경책 안에 있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글들을 문학적 성격별로 나눌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부인하지 못한다. 그때 룻기는 단편 역사소설로 구별된다. 구약성서를 크게 오경-역사서-성문(또는 시문)-예언으로 대분하고 여기에 룻기를 역사서에 넣었다고 해서 룻기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이라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배경을 갖고 기록된 역사소설로서 특정 시대를 배경삼고 있기 때문에 역사서라는 이름 안에 분류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룻기를 대하는 믿음의 독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본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룻기의 내용을 통해 신앙적이고 종교적인 교훈을 얻어 믿음생활에 적용하려는 목적을 갖고 읽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형제가 소개될 때에는 출생순서에 따라 형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아우의 이름이 나중에 나온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세계공통의 문화적 관습에 따라 말론이 형이고 기룐이 동생이다(1:2,5). 그렇기 때문에 4절에 의하여 룻은 두 번째 며느리이고 오르바가 맏며느리인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4:10에 따르면 룻은 말론의 아내이다. 그렇다면 1:2를 근거로 볼 때 룻은 맏며느리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보는 것은 단순한 시각이다. 4:9에서 형제의 이름이 바뀌어 ‘기룐과 말론’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룻은 둘째 며느리라는 뜻이다. 뒤죽박죽이다. 과연 룻은 맏며느리인가. 둘째 며느리인가? 말론이 형인가. 기룐이 형인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어야 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는 성경이 왜 이렇게 일관성이 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정확하지 않고 애매모호한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성경은 원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믿음’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종교경전이다. 그러므로 종교경전으로서의 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기법을 통해 말씀을 전하는 것에 목표가 있다. 성경본문을 기록한 저자는 역사를 이야기의 배경으로 사용하여 말씀을 전하는 이야기의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다.
ㅇ그래서.... 룻은 맏며느리인가. 둘째 며느리인가?
결론적으로 말해 룻은 맏며느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룻기에 사용된 문학적 기법을 분석하면 간단히 확인된다.
1:2,5에서 형제의 순서는 말론 기룐이다.
1:4에서 며느리의 순서는 오르바와 룻이다.
이때 일반적인 생각으로
말론 - 오르바
기룐 - 룻
....이 짝지어진다. 대구법에 따른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4:10을 근거로
말론 - 룻
기룐 - 오르바
.... 로 확정된다. 그렇다면 1:2,5와 1:4는 x자 형태의 교차대구법으로 만들어진 문학적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발생했던 사실을 가능한 한 그대로 기록하는 역사서는 이런 방식으로 기술되지 않는다! 역사서술 방법론에 따르면 이런 식의 문학적 방식을 따르는 역사 서술방식은 없다.
대구법이니 교차대구법이니 하는 문장 서술방식은 문학에서 사용하는 수사법 용어이다. 그러므로 룻기가 이와 같은 문학적 수사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룻기가 역사서가 아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문학적 필치를 통한 저자의 의도와 저자의 종교 문학작품을 통해 나타나는 “믿음을 위한 말씀”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ㅇ내용에 흐르고 있는 전제되는 신학적 사상
성경의 전반적인 사상적 경향에 따르면 형제 사이에 어떤 것으로든 우열이 있을 수 없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창세기를 시작으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평등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 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열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 맥락에 의해 기룐과 말론의 경우에서도 형과 아우로서의 출생순서에 따라 어떤 형태로든지 나타날 만한 우열성이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이방인 여인이 그토록 선민의식이 강한 유대인 다윗왕가를 출발시켰다는 것에서 보편주의적 만민 평등사상이 훤히 내다보이지 않는가?
그렇기에 형제들은 언제든지 형이 아우가 되고 아우가 형이 될 수 있음을 상정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창세기의 야곱 이야기를 통해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세계에서 출생순서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것의 변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임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출생순서에 따라 믿음의 용량이 정해지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존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평등한 실재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미약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기반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한 실례가 룻기이다. 믿음을 가진 독자들은 룻기를 통해 세상 만민 중에 가장 연약한 종족이었던 이스라엘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왔는지를 본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믿음으로 설계하도록 이끈다.
룻기는 역사소설의 모습을 갖고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정말.... 소설같은 복있는 삶을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룻기는 “말씀”이 담긴 흥미진진한 역사소설이라고 요약,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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