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이야기 최종편집자.... 참 많이도 애썼다.
그런데 왜 어떤 자들은 거룩한 성경말씀의 창조말씀을 창조신화라고 말하는가?
고결한 믿음을 깨부수려는 반-신앙적 자유주의의 물이 들어서 그런 것인가?
∎신화의 어의
히브리어 정경에 있는 창조이야기는 최종편집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허다한 이야기 자료들 중의 일부였다. 그것은 맨 처음에 시작된 우주만물의 존재사에 관한 신화들이었다. 신화란 동화작가가 책상에서 이야기를 글로 쓴 것처럼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신화는 말 그대로 ‘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신에 대한 이야기, 혹은 신의 이야기인 신화는 인간의 두뇌에서 작동하여 창작된 단편소설 같은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 신화는 인간의 처절한 삶을 나타내기도 하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미래를 그려내기도 한다. 신화는 인간의 언어로 신을 말하는 글이지만 인간의 언어로 나타나는 신의 이야기는 모두 최종적으로 인간을 상대한다.
신화가 가리키는 최종 도착지, 혹은 최종 목적지는 인간이다. 그래서 신화의 이야기들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내용들은 모두 인간과 연결되어 있다. 신화가 신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신들만의 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신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는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언어로 되어 있는 한 신화는 무조건, 이유 없이 인간을 향해 있는 이야기들이다.
이 신화를 우리말로 한자를 사용하여 ‘신화(神話)’라고 일컫는다. 한자단어 그대로 ‘신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화라는 용어의 쓰임새에 대해 어리숙한 선입감을 갖고 부들거리며 정죄심을 뿜어댈 일이 아니다. 용어에 대한 무지함만 표출하는 짓이 될 뿐이다.
∎신화가 그리스도교 경전에서 갖는 의미
히브리어 정경의 창조이야기를 현재형태로 만든 최종편집자는 주변에 허다하게 있던, 그리고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던 수많은 창조관련 이야기 자료들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씀’이라고 판단되는 내용”을 취사선택하여 현재의 본문으로 만들었다. 당연하게도 취사선택의 기준은 ‘말씀’이었다. 이야기라고 해서 모두가 다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말씀’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무지하여 어느 것이 말씀인지 모른 채 지났다. 숱하게 많은 이야기들 속에 그것이 말씀임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있었는데도 인간적인 상상력에 부합하는 신비하고 거룩한 것들만 추구하던 인간들은 그 이야기들 속에 인간을 향한 지극한 엘로힘의 말씀이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감받은 신앙인이 없지 않았다. 그가 바로 현재형태로 본문을 만들어낸 최종편집자이다. 최종편집자는 허다한 이야기들 중에서 ‘말씀’이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 말씀이 언제나 함께 있어 왔음에 감격하여 말씀을 말씀되게 하고자 현재형태로 만들어냈다.
말씀은 엘로힘이 특이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임하여 ‘받아쓰기’시켜서 있게 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교의 독특한 독자성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종교우월주의자들은 특징 있는 신비성을 강조하고 싶어서 창조이야기 뿐만이 아니라 지금의 성경책 전체가 다 이와 같은 인간적인 수준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혼자 정통 믿음을 갖고 신앙을 수호하는 것처럼 부들거리며 성질을 부리지만 현재의 성경책을 구성하는 성서본문들은 구교나 신교나 예외 없이 인간들의 수고가 이뤄낸 최종 결실이다.
∎영감받아 기록되었다거나 계시 받아썼다는 성경의 표현에 대한 이해
자신의 상상력으로 그려낸 신령하고 거룩한 방식에 맞아야 전능한 엘로힘의 말씀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함께 해 온 엘로힘은 수다한 인간들의 삶 속에서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승되기도 했고 어떤 이야기는 고대로부터 발명된 쐐기문자나 상형문자 등으로 남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지금의 모습으로 문자화되어 전해지면서 말씀은 ‘언제나 만남이 가능한’ 엘로힘의 언어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계시받은 말씀은 마치 출애굽기에서 보는 대로 야웨 엘로힘이 모세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처럼 받게 된 것이 아니다. 영감 받아 기록된 말씀은 이미 있던 수다한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전혀 새로운 내용을 받아쓰기하여 있게 된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출애굽기의 모세에게 단독으로 주어진 야웨 엘로힘의 말씀은 이미 고대 주변 세계의 일상에서 상존하고 있던 내용들이다.
출애굽기의 십계명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히브리어 정경만의 독특한 내용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창조주 야웨 엘로힘이 내린 계시의 말씀은 히브리어 정경에만 있을 뿐, 세상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내용이라고 보는 시각에 스스로를 제한시키는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소견은 버려야 한다.
이미 상존하고 있던 흔한 이야기들 중에서 쓰레기 같은 인간들조차 마다하지 않고 전달되며 나누어지던 친숙한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중에서 ‘이거다’라고 영감 된 이야기가 본문 최종편집자에게 선택의지를 계시하였다. 그에 따라 본문의 최종편집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이야기가 선택되어 지금의 그리스도교 정경, 히브리어 정경과 헬라어 정경형태로 나타났다.
이전부터 있었던 여러 말씀자료들 중에서 어떤 자료를 택할 것인지의 최종 취사선택권은 전적으로 인간편집자의 몫이었다. 본문을 현재형태로 만든 최종편집자는 마치 벽돌 파편들처럼 주변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며 영감에 찬 이야기라고 판단되는 내용을 선택하여 종교적⋅신앙적으로 매우 크게 기여할 내용으로 만들었다.
파편처럼 흩어져 다니던 다양한 여러 이야기들을 지금의 형태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최종편집자가 이야기를 상대로 행한 일이 있다. 때로는 자신의 종교적, 신앙적 입장을 마치 풀처럼 사용하여 두 이야기를 서로 이어 하나의 이야기가 되게 하였고, 때로는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이야기는 삭제시켜 버렸으며, 또 때로는 이야기 내용을 매끄럽게 하거나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단절되어 있는 논리를 세우기 위해 문장을 수정하거나 어휘를 교정하는 등의 글 편집을 했다. 그것이 성서본문에 그대로 다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저 고대의 본문최종 편집자와 함께 나누는 야웨 엘로힘의 말씀
당연하게도 그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만든 후에 인간이 입만 벌리면 넣어주는 방식이거나 불러주는 대로 기록하는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수고한 결과로 현재의 본문이 만들어졌다는 것의 의미는 이렇게 정리된다.
(1)인간의 삶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2)야웨 엘로힘의 말씀이라고 판단되는 이야기와 그 내용을,
(3)영감받은 최종편집자가 손을 움직여 선택하고,
(4)그 이야기들을 하나의 글묶음으로 묶어서,
(5)야웨 엘로힘의 말씀으로 전해야 한다는 계시에 따라,
(6)지금의 본문형태가 있게 했다.
확실한 것은....
개신교의 성경책이든지 천주교의 성경책이든지 모두 가릴 것 없이 지금의 성서본문은 어느 날 야웨 엘로힘이 특정의 인간을 방문하여 출애굽기에서 받는 인상과 비슷하게 말씀을 직접 돌판에 기록하여 주듯 했거나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귀에 들려준 말씀을 인간이 받아 쓴 기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고 있던 수많은 다양한 이야기들 중에서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되어 취사선택된 내용이 지금의 말씀을 구성하는 ‘정경’이라는 성경책으로 그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당연하게도 취사선택의 기준은 종교적, 신앙적 영감성이 있는 내용인지의 여부,
(그래서 외경과 위경이라는 글로 분류되었고, 외경과 위경은 정경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그리고 종교적 신앙적인 계시에 의한 활동의 결과인지의 여부....
(저자가 누구냐, 혹은 어떤 사람이냐를 고려해서 본문에서 경험되는 원저자의 종교성, 신앙성의 정도를 가늠해보는 과정을 거쳤다.)
....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오늘날의 개신교 성경책이나 천주교의 성경책은
인간이 손을 댄 결과로 인해 만들어진 창조적인 글모음집이지만,
종교적이고신앙적인 목적을 갖고 이루어진 야웨 엘로힘의 말씀모음집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모두 그리스도인들에게 야웨 엘로힘의 말씀이다.
-->> 그러므로 성경책은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목적으로 읽지 않으면 지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문학 서적으로 변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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