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창조이야기에서 수중생물과 새들은 다섯째 날 같이 만들어졌다(창1:20~23). 그에 대한 이야기 내용은 아래와 같이 구조화될 수 있다.
∙20절: 수중생물/새들
∙21절: 수중생물/새들
∙22절: 수중생물/새들
그런데 20절에서 ‘생물(네페쉬 하야)’을 번성하게 하는 동력은 각 생물들 자신이 아니다. 각 생물들이 살고 있는 지정된 ‘물들(함마임)’이다. 또 ‘생물’은 수중생물들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살아있는 생명체 전체를 통칭한다. 그러므로 문장의 흐름에 따르면 ‘물들’이 새들의 개체수 증가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이해하게 된다. 그에 따라 다음과 같이 다시 구조화시킬 수 있다.
∙20절 앞: 물들에게 준 역할
∙20절 뒤: 새들
∙21절 : 수중생물들 - 새들
∙22절 : 수중생물들 - 새들
∙23절 : 수중생물과 새들이 만들어진 때
이 구조는 새들에 대한 창조이야기 사이에 수중생물에 대한 창조이야기가 수미쌍관법 형태로 나타남을 보여준다.
∙물들에게 준 역할(20절앞)
∙새들(20절뒤)-수중생물들(21절앞)-새들(21절뒤)-수중생물들(22절앞)-새들(22절뒤)
∙수중생물과 새들이 창조된 때(23절)
수중생물과 새들에 대한 창조이야기를 왜 이런 구조로 기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이 설명될 수 있다.
1.개체수 증가의 동력(번식력)은 물이다.
20절에 따르면 지정된 복수형태의 “물들(함마임)”이 생물을 번성케 한다. 번성케 하라는 것은 개체수를 증식시키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그 뒤에 새들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이어진다. 그에 따라 “물들”은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들의 증가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게 된다. 왜냐하면 “생물”은 수중생물만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며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간은 히브리어 성서에서 “땅 위 하늘들의 궁창 표면 위”이기 때문이다.
“땅 위 하늘들의 궁창”에서 궁창은 물이 존재하는 하늘 영역이다(6절~7절). 궁창 아래의 물은 지상의 물들을 가리킨다(9절~10절). 새들이 날아다니는 공중은 “하늘들의 궁창 표면 위(알-페네)”이다. 이것은 2절의 ‘물들의 표면 위(수면 위)’와 똑같은 어법이다. 그렇다면 하늘을 나는 새들은 하늘에 있는 물의 표면 위를 날아다니는 셈이다.
창조이야기에 지하수 관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지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들의 범주에 공중을 날 수 있는 조류만 넣은 것이 아니라 퍼덕거리는 날개는 있으나 날지 못하는 가금류도 “새들”의 범주에 넣었던 것으로 생각된다(21절). 그에 따라 새들의 번식력은 물에 있다는 20절과 ‘땅 위에서의 개체수 증가’를 축복한 22절의 수미쌍관법 형태는 자연스럽다.
이것은 다양한 종류의 새들에 대한 생식지식이 없던 고대의 생물학적 상식에 제한을 받아 조류의 번식이 물에 의하여 되는 것이라고 보았음을 나타낸다. 가금류에서 알을 낳을 수 있는 암컷과 알을 낳지 못하는 수컷은 구별될지라도 가까이에서 늘 보는 가축들의 암수 생식활동에 비견될 만한 유형이 없다는 것에서 발생한 한계지식일 수 있다.
또 수중생물들의 개체수 증식과 관련된 현대 생물학적 생식지식이 나타나지 않는 것 역시 당연하다. 바다의 어떤 거대 짐승들은 육상동물들처럼 젖으로 새끼를 키우는 포유류라는 생물학적 상식이 있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수중생물들과 새들의 개체수 증식은 하나님의 개입 없이 물로 이루어진다는 관념은 일면 자연스러운 관찰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관찰을 한다고 해도 아가미가 없는 거대 포유류는 산소호흡을 하기 위해 이따금씩 물 밖으로 코를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하나님 없이는 살아도 물 없이는 못 산다
창조이야기에 의하면 물에서 사는 수중생물과 날개 있는 모든 새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없이 각각 그 종류대로 생겨났다(21절). 여러 수중생물들이 사는 물들의 위치가 서로 다르듯이 물들의 종류도 같지 않아 복수형태의 바닷물들이라고 일컬어진다(22절). 바닷물만이 아니라 지상의 거대호수들에 있는 물들, 거대강물들도 지리적인 위치와 물의 질적 종류가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물을 복수형으로 지정하여 물들(함마임)로 나타낸 것(20절)은 자연스럽다.
수중생물들과 새들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활동은 여기까지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수중생물들과 새들을 창조하면서 개체수의 양적인 증가를 축복했을 뿐이다(22절). 생물체의 개체수 증가와 관련된 창조주 하나님의 축복말씀을 실행시키는 동력은 ‘물들’이다(20절). 이제 이후로 창조주 하나님은 수중생물들이나 새들의 삶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수중생물들과 조류는 하나님 없이 살아도 물 없이는 못 사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물이 없으면 개체수의 증가는 물론이려니와 생명체의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개신교의 개역개정은 히브리어에 맞춰 주어를 복수형태인 ‘물들’로 번역했다. 그것은 수중생물들과 새들의 삶에 있어서 번식과 개체수 증가의 절대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직접 관여로 인해서가 아니라 물들이 그것의 동력으로 작동함에 따른 것임을 명확하게 말했다.
한국천주교 번역은 주어를 ‘생물’로 바꿨다. 수중생물은 절대로 물 없이 살 수 없는 생명체라는 특징은 손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이 주어이면 다른 생명체들도 수중생물처럼 물에서 살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생긴다. 양서류를 염두에 둔 번역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양서류는 수중생물과 같이 전적으로 물에서 살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번역은 논리오류를 발생시키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좋아하심이 어디에 근거하는지를 보면 이를 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창조주의 기쁨은 수중생물과 새들을 ‘종류대로 창조하심(21절)’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다양성의 어우러짐을 좋아하시는 창조주라는 진리를 알게 해주는 표현이다. 창조주는 서로 다름에 의한 다양성, 혹은 다양성에 의해 생겨나는 서로 다름이 함께 어우러져 날아다니고 풍성하게 번식하여 함께 살아가는 조화로운 모습을 좋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창조이야기가 전한다.
명확하게도 하나님의 기쁨은 생명체들의 풍성한 번식에 있지 않다. 수중생물과 조류의 번식은 물들이 번식의 동력(번식력)으로 작동하도록 명령되었으므로(20절) 물에 의해 번식한다. 따라서 풍성한 개체수 증가는 물들에 의한 번식력의 기능에 바탕을 둔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최초의 생명이 물에서 발생했다는 생명발생설, 생명기원설과는 전혀 관계없다. 조류는 수중생물 이후에 발생되었다는 종발생계통과도 무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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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는 종교언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구약의 창조이야기는 종교목적으로 기록된 내용이므로 동식물 상관없이 지상의 모든 생명체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활동으로 말미암은 결과라고 보도록 안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아닌, 인간 이외의 존재가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인간역사의 방향을 잡아준다는 외력, 타력구원을 지향해 간다. 이 관점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생명관에 기반을 둔 모든 종교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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