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 이해를 위한 성서와 교리 비평/교리

창조이야기에서 보는 신정론의 오류와 무의미성

YoungSoul's pen 2022. 1. 7. 11:58

신정론의 전제가 잘못되었다.

 

신정론의 핵심은 이렇다.

 

전능하시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왜 악, 이유없는 고난을 허용하는가?’

 

여기서 두 가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회의적인 이의가 제기된다.

 

1. , 이유 없는 고난이 현존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혀 전능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닌가?

 

전능한 하나님이 왜 이유없는 고난을 제거하지 못하는가?

 

 

2. , 이유 없는 고난이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선하신 하나님이 전혀 선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닌가?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왜 부당하고 억울하며 설명도 되지 않는 악, 고난이 횡행하게 하는가?

 

 

이와 같은 내용의 신정론 질문은 창조이야기의 관점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정론이 제기하는 질문의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질문이 출발하는 전제가 잘못되었으므로

 

신정론 관련 질문은.... 창조이야기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세계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거나

약자의 입장에서 억울하게 당한 부당함, 불공평과 관련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반발성의 지능형 질문으로 남을 뿐이다.

 

 

창조이야기를 통해 보는 신정론의 오류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이해되는 종교적 상징에 의하면

악의 세력, 사탄의 권세, 이유 없는 고난의 원천.... 등은 어둠의 세력으로 표상된다.

그러므로 어둠, 흑암은 인간세상에 죄, 죽음, 고난을 가져오는 

부정적인 측면의 종교적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창조이야기에 의하면, 이 흑암은

창조주가 창조활동을 하기 위한 무대이며 배경이다(1:2)

어둠을 무대삼아 흑암을 배경으로

그 흑암을 물리치며 어둠을 밝히는 빛이 창조되었다는 것이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첫날의 창조이야기이다(3~4)

 

그렇기 때문에 창조이야기의 최종편저자가 말하는

죄와 죽음, 그리고 이유 없는 고난을 가져오는 흑암의 세력은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개시되는 무대이며

빛이 창조된 배경이기 때문에(1:2,4)

창조주의 전능성과 선성을 전제하는 신정론은 출발점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게 된다.

 

어둠이 없이, 흑암이 없는 무대를 배경으로 창조주의 활동이 개시된 것이 아니다.

어둠은 창조활동의 배경이지 창조활동의 결과로 나타난 상대가 아니다.

창조주가 태초에 창조되지 않은 것처럼 어둠도 창조되지 않았다(1:1~5).

어둠, 흑암은 창조활동이 시작되는 무대이며 빛이 만들어지는 원천적 배경이다.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어둠의 성격이 이러한데

종교적으로 죄, 고난, 자연재해, 질병.... 등을 표현하는 상징적 개념과 관련하여

창조주의 전능성과 선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러므로 신정론은 질문의 전제가 잘못된 오류라고 못박아 말하게 된다.

 

 

창조이야기가 말하는 흑암 속에서 개시된 창조활동이 갖는 의미

 

어둠은 빛이 전혀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생명 없음을 나타내는 상징이므로

어둠은 죄와 죽음을 비롯한 온갖 부정적인 측면의 기원임을 표상한다.

그래서 종교적으로 어둠을 하나의 세력으로 추상화시켜 묘사하면

그것은 종교적 측면에서 악의 세력, 사탄의 권세를 가리키게 된다(1:13).

 

그러나 다신교, 다종교 세계관 속에서 일신교적 창조주 하나님 신앙을 강조하는 구약은

악의 세력이나 사탄의 권세마저도 하나님의 창조결과라는 관념을 표방했다(45:7).

이런 시각에서 욥기는 사탄의 세력조차도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악의 세력도, 사탄의 세력도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는 신앙고백적 진술이다.

 

하지만 창조이야기에서 어둠은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있게 된 배경이며 창조활동의 결과물들이 나타나는 무대이다.

그러므로 흑암의 권세, 어둠의 세력 등으로 묘사되는 종교적 추상은

전능하시고 선하신 창조주로 묘사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활동에 의해

점점 약화되어가는 방향에서 신정론의 오류가 교정되어야 한다.

 

그에 따라 신정론이 제기하는 반발성, 반항성, 창조주를 향한 원망성 질문은

창조이야기의 관점에서.... 이름 없이,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하고 힘없이 스러져 사라지는

약자들의 무수한 희생의 터를 발판으로 빛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쪽으로 묘사되어야 적절하다.

신약의 예수 죽음과 부활신학은 바로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어둠의 세력을 완벽히 몰아내는 빛의 창조적 세력확장을 지시한다.

 

따라서 창조활동의 배경이며 무대인 어둠은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성과 선성에 의해

단 한 번에 제거되었어야 하는 악의 세력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활동의 배경인 어둠, 창조활동 결과물이 놓이는 무대인 어둠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창조주의 창조활동 자체가 진술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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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이야기의 최종편저자의 관점에서 신정론의 오류를 정리하면 이렇다.

 

창조주의 선하심이 어둠을 밝히는 창조활동으로 나타난 것이고(1:2~5)

창조주의 전능하신 창조활동의 결과가 어둠이 배경이었던 무대를 밝히면서 나타난 것인데,

창조주의 창조활동의 배경이며 무대였던 그 어둠을 두고

 

하나님이 왜 어둠으로 표상되는 악의 세력이유없는 고난을 허용했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배경도 없이, 무대도 없이 창조활동을 했어야

진정으로 전능한 것이며 선한 것이 아니겠느냐고 들이대는 것일 뿐이다.

배경도 없이, 무대도 없이 창조활동을 했어야 참으로 전능한 창조주라는 논리인 셈이다.

 

 

그러므로 느닷없는 죽음, 질병, 자연재해, 약자의 부당한 억울함 등과 관련하여 제기되는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에 연결된 신정론은,

어둠의 세력, 사탄의 세력으로 표상되는 종교적 추상언어의 논리체계에서 볼 때

창조주 하나님이 선하지 못하고, 전능하지 못해서 어둠의 세력, 사탄의 세력이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유 없는 고난, 맥 없이 스러지는 약자들의 죽음 등을 나타내는 어둠, 흑암은

창조주의 창조활동을 위한 배경이며 창조물들이 배열되는 무대이기 때문에

생명을 앗아가는 악의 세력으로 표상되는 어둠의 권세, 흑암의 세력에 대하여

전능성과 선성을 지닌 창조주 하나님의 무능성과 비선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질문의 오류라고 기술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주의 전능성과 선성은 창조활동의 결과로 빛에 의해 어둠의 배경이 사라지고,

어둠 이외에 아무 것도 없던 무대 위에(1:2) 온갖 창조의 결과들이 배열, 배치되는 것을 통하여

현재도 창조의 결과가 최종적으로 완료될 지점을 향해 가는 중이므로

지금 이 시간에도 창조주의 전능성과 선성이 나타나고 있는 중....

이라고 진술하는 것이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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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창조의 결과가 최종적으로 완료될 지점을 향해 가는 중?

지금 이 시간에도 창조주의 전능성과 선하심이 나타나고 있는 중?

그렇다면....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종료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렇다!

창조주의 창조활동은 창세기의 6일째 활동으로 완벽하게 종료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6일째 되는 날 더 이상 손 볼 데가 없어서 완벽하게 종료된 것인지,

아니면 7일째 되는 안식일날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완전하여 그것으로 마무리된 것인지,

창조이야기 최종 편집자도 단정짓지 못했다(창1:31과 창2:2 비교).

 

창1:31에 창조주가 피조된 세계의 모든 것을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창조활동의 완벽한 마무리를 나타내는 표현인가?

 

또, 창2:1의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졌다는 표현은 피조세계가 완벽하게 창조되어

더 이상의 창조할동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의 표현인가?

창2:2는 일곱째날 이후 더 이상의 창조활동은 없을 것이라는 뜻인가?

만일 그렇다면 일곱째날 이후 창조주의 창조활동은 종료되었다는 의미인가?

 

창조이야기의 최종편저자도 단정짓지 못한 창조주의 창조활동 종료여부에 대하여....

"창조주의 창조활동으로 만들어진 세상은 완전하여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는데

그토록 완벽한 세상을 인간이 죄를 지어 더럽혔다"면서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내세워 주장할 수는 있어도

 

피조세계는 창조주의 창조활동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져 더 이상 손 볼 곳 없는 완전한 상태로 마무리되어

그것으로 창조주의 창조활동은 종료되어었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 믿음을 뒷빋침해 줄 어떤 구절이니 단어, 혹은 암시라도 할 만한 본문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한 초극보수 신앙의 맹골수 신자들이라고 할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을 추구하는 믿음의 표상이 없어지지 않는 한

현재의 하늘과 현재의 땅은 완벽하지 않다는 반증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종료된 완벽한 세상이라면 아무리 인간이 더럽혔다고 할지라도 

벧후 3:10~13과 같이 현재의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는 과정을 통해

새 하늘과 새 땅이 다시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결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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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 과정에서 숱한 생명들이 생성소멸되는 과정이 반복될 뿐이며

그 과정에서 부당하고 공평하지 못하며 설명되지 않는 난데 없는 고난이

창조적으로 극복되고 있다는 것이 성서의 신앙고백적 흐름이다.

 

다만, 길지 않은 짦은 인생 사는 중에 그 난데없는 고난, 느닷없는 부당한 억울함이

바로 내게 닥침으로 내가 당한다는 것에서 신정론이 제기되는 것일 뿐이다.

 

짧은 인생 사는 중에 왜 이런 고난이 이렇게 닥치는 것이냐...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저 갓난아기가 무슨 죄가 있느냐,

저 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런 불행을 당해야 하느냐는 불공평의 느낌과

정말로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판단되는 현실 속에서 갖게 되는 약자의 한 맺힘 때문에....

 

이런 이유들로 인해 종교적 희망 중에 종말론적 기대, 종말론적 희망, 악의 세력에 대한 최후심판,

부활 재림 심판 .... 등등의 종교요소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종교적 요소들을 이용하여 입신양명을 기하는 종교가, 종교인, 종교업자들의

뛰어난 기지와 지혜가 또 다른 악의 세력, 어둠의 권세를 형성하기도 한다는 사실이

중세 유럽의 카톨릭을 통해 역사 속에서 증명되었다.

 

참말로,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약자가 강자되면 또 다른 약자를 창조적으로 양산한다는 것이 역사 속에서 증명된 진리(?)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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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니....

왜 이유 없는 고난이 현재에도 진행중이어야 하느냐,

전능하시고 선하다는 하나님은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냐....는 약자의 서러움을,

현실 속에서 해소하는 것은 창조활동의 완료시점에 이르러서야 가능할 것인 바,

 

세상이 지속되는 한, 낮과 밤이 교대로 교차되는 천체운동 역시 계속될 터,

그로 인한 종교적 상징이 달라지지 않는 한, 전쟁과 기근, 자연재해, 약자의 고통,

억울한 죽음 등도 역시 지속될 것인 바,

 

다만 노력하며 살 뿐이다. 생명이 있는 동안....

 

약자가 강자되면 같은 짓거리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지난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동시에

지금의 이 현실 속에서도 잘....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신정론의 문제는 약자의 입장에서 제기하는 반발성 이의제기일 뿐

창조이야기의 관점에서 볼 때 이와 같은 신정론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숱한 생명들의 생성소멸 과정 속에서 천천히....

하루가 천년같은 속도로....

완전을 향해 가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그리스도교 입장을 고려해 볼 때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최종적으로 종료되는 시점은?

창조과학자들의 되지도 않는 계산법에 따르면....

그들이 계산한 젊은 지구론에서 지구 나이를 염두에 두고

창 2:2의 칠일 째 되는 안식일에 창조주가 안식했다는 내용을 볼 때....

 

이제 하루 남은 셈인가?

 

그렇다면 앞으로 천 년 후에 재림심판주 강림하시고

죽은 자들 부활하여 의인과 악인이 나누어진 다음에

새롭게 만들어진 새 하늘과 새 땅이 의인에게 허락되고 악인들은 영벌에 처해짐으로서

빛이신 하나님의 영원한 빛이 찬란하게 비추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복락함으로

창조주의 창조활동이 완벽하게 종료되겠다.

 

이사야 7:3의 구세주 처녀 탄생이

나사렛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문자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하는 입장에서 볼 때,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예수 탄생 이후 이틀 지났는데 재림주 강림은 하루 남았다니

이 얼마나 고무적이며 희망에 찬 일이 아닐 수 있는가?

 

창조이야기에서 볼 때 무의미한 신정론의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