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장과 창2장의 창조이야기가 보이는 차이점은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
먼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창1장은 다신교 시각으로 보아야 자연스러운 복수형태의 창조주들인 엘로힘이 등장한다. 엘로힘(복수의 하나님들)은 엘(단수의 한 하나님)의 복수형태이므로 창1장의 창조주는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말하는 한 분 절대자 유일신 야웨 하나님이 결코 아니다. 복수의 여러 하나님들(엘로힘)이다.
복수형태의 엘로힘이 창2장에서는 단수의 한 하나님으로 바뀐다. 엘로힘들 중의 한 엘, 곧 야웨라는 이름을 가진 한 하나님이라는 개념으로 변화된다. 그것은 창1장의 다신론 관점이 일신론 관점으로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창2장의 여호와 하나님으로 번역된 “야웨 엘로힘”이라는 표현은 “엘로힘 중의 야웨”라는 뜻이다. “여러 엘들(엘로힘) 중 ‘야웨’라 이름하는 엘”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은 복수형의 엘로힘 중에서 야웨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단수의 엘을 가리킨다.
창2장에 나타나는 개신교측의 ‘여호와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 정경의 “야웨 하나님”을 천주교 성경은 유대교의 입장에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는 신앙의 정서를 반영하여 ‘주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야웨 엘로힘을 ‘주 하나님’이라고 번역했다고 해서 창1:26~27에 나타나는 다신론 관점을 없애지 못한다.
이러므로 너무도 확실하여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히브리 정경의 창1장을 통해서 창조주로 소개된 하나님은 단수형의 한 하나님(엘)이 아닌, 복수형태의 여러 하나님들을 가리키는 어휘라는 점이다. 이 창조주 하나님들을 가리키는 창2장의 엘로힘이 창1장에서 ‘여러 하나님들 중에서 야웨라고 불리는 한 하나님’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변했다.
이런 변화는 다신교 세계에서 일신교 공동체를 이루며 이스라엘의 하나 됨을 추구했던 야웨 하나님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임을 말해 준다.
다음으로 물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창1장에서 ‘물은 창조되지 않았다.’ 물은 창조되지 않은 상태에서 태초부터 존재했다(2절,6절~7절,9절~10절). 뿐만 아니라 물들은 지면과 수면의 모든 생물을 번성케 하는 동력이다(20절~22절).
창2장에 따르면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초목도, 채소도 나지 않았다. 땅에 물이 없어서 식물의 생장환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표현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도 무엇이 증발해서 생긴 안개라는 것인지, 안개의 정체에 대해서는 말이 없고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 수분기가 없는 상태인데도 안개만이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다고 되어 있다(6절).
이 진술은 안개가 물의 증발과 지표면의 온도차이로 인해 생기는 수증기 현상이라는 관념이 없던 고대의 시각 안에서 본문이 기록되었다는 점을 참작하여 고려되어야 한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축축하게 젖은 지표면의 흙을 보고 안개가 땅의 흙을 적신 것이라고 보았을 것이다. 땅의 흙이 적셔질 정도면 아직 어두울 때 흩뿌려진 비와 해뜰녘 새벽의 기온 차에 의해 생긴 수증기 현상으로 생긴 안개일 것이다. 그런데 고대의 시각 안에서 땅을 적신 것은 비가 아니라 짙은 안개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여기서 물에 대한 이해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창1장에서 물은 생명과 관계가 있다. 적당한 물은 생물을 번성케 한다. 그러나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이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물,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물의 공격은 모든 생명을 앗아간다. 생명과 관계가 깊은 물의 속성에 대해 창1장은 창조되지 않은 존재, 태초부터 있던 존재, 하나님의 영이 떠다니던 태초부터의 존재로 말한다.
하지만 창2장에 의하면 물은 하나님이 비를 통해 적시에 주시는 은혜이다. 그 은혜가 없으면 초목도, 채소도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를 내려 물을 주느냐 마느냐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소관이므로 인간존재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안개로 인해 적셔지는 것을 넘어서서 비로 인해 촉촉히, 충분히 흠뻑 젖는 은혜를 받게 된다.
한편 창조된 인간존재를 보는 시각의 차이도 관찰된다.
땅의 흙이 안개로 인해 적셔졌다(6절)는 말은 물과 관계 없이 땅이 축축하게 적셔진 것으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물로 인해 땅의 흙이 적셔진 것이 아니라 안개로 인해 땅의 흙이 적셔졌고 적셔진 땅의 흙이 재료가 되어 인간존재가 창조된다(7절).
이 내용을 4절~6절에 연관시켜 보면 인간존재는 하늘과 땅이 창조된 이후 만들어진 첫 피조물이 된다. 하늘과 땅은 날짜와 상관없이 만들어졌고(창1:1) 날짜 관념이 작용하면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피조체가 창1장에서는 빛이다. 그리고 창1장에 의하면 인간존재는 만물의 맨 마지막에 창조되었다. 그런데 창2장에 의하면 하늘과 땅이 만들어진 후 창조된 첫 번째 피조물은 ‘인간’이다(4절~8절).
창1:27만 본다면 인간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재료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1장에서 인간은 땅의 흙이 적셔진 것과 상관 없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 정경의 단어에 의하면 인간존재를 창조할 때 창조주가 사용한 재료는 지표면의 흙먼지이다. 천주교성경은 이를 문자적으로 흙먼지라고 번역했다.
창조주가 지표면의 흙먼지로 인간존재를 만들 때 그 흙먼지가 뭉쳐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창2장에 의하면 인간존재가 만들어지기 전의 지표면은 비가 내리지 않아 물기가 없는 상태였다(5절). 그런데 안개가 땅에서 올라와 지표면을 적셨다고 했다(6절). 그러므로 인간존재가 창조될 때 사용된 흙먼지는 안개로 인해 적셔진 흙먼지였으며 그것이 뭉쳐진 상태에서 인간존재의 외형이 만들어지고 그 코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생명체가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6절~7절).
인간의 외형을 만드는데 사용된 지표면의 흙먼지는 비가 오지 않은 상황에서 안개로 적셔진 흙먼지였기 때문에 충분히 적셔지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한다. 다만 인간의 외형을 만들 정도로 뭉쳐졌다고 보게 된다. 이에 대해 천주교측과 개신교측이 함께 번역한 공동번역은 흙먼지에 어느 정도 물기가 있었음을 전제하여 ‘진흙’이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인간존재가 태생부터 물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그런데 이 물은 하나님이 내리는 비를 통해 은혜로 거저 받게 되는 선물이다. 그것은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물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존재이지만 그 물은 거저 주어지는 무한선물이라는 점이 적시된다.
인간존재는 생명과 직결된 물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개의 강도 아니고 네 개의 강, 동서남북으로 흘러내리는 강들이 에덴을 발원지로 삼아 흐르게 만들었다고 말한다(2:10~14). 그것은 인간존재가 지상의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지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제한다. 그렇지만 창1장은 이와 전혀 다르게 ‘말씀에 의해 단번에 만들어진 인간존재’를 말한다.
또 창1장과는 달리 창2장은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창1장은 창조주의 창조활동에 의해 생성된 우주창조를 시작으로 창조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창2장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에 따라 두 개의 창조이야기 중 창2장은 ‘인간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가득찬 인간창조 이야기라는 독특성을 나타낸다.
창2장에서 시작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창1장에서 창조된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창조주 하나님은 지구의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창설하시고(8절, 에덴 동산) 지표면의 흙먼지로 인간(7절)을 창조하신 후 그곳에 창조된 인간을 두신다(8절). 여자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은 뒤(18절) 얼마의 시간이 지나 창조된다(20절~21절). 이와 달리 창1장에는 남자와 여자가 동시에 창조된 것으로 되어 있다.
창2장에 따르면 여자가 창조되기 이전에 창조주가 인간을 위해 생활터전을 마련했다. 지구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만든 동산이 그것이다(8절). 창2장은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에덴의 동산이 하나님께 얻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거저 주신 최적의 삶의 터전임을 말한다(8절 이하). 이것은 지구 안 동쪽에 준비된 인간의 삶의 터전으로서 낙원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창2장은 이 에덴의 동산(히, 간 에덴)이 어떤 곳인지를 자세히 묘사한다.
물론 여기에 나타나는 묘사들을 근거로 에덴동산의 위치를 지리적으로 추적하여 지정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13절의 구스는 지금의 아프리카 이디오피아를 말하는 것일 텐데 그럴 경우 지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발원된다는 네 방향의 각 강들에 대한 기술은 생명수가 필요한 지상 도처의 인간존재들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한공급의 물을 말하는 종교적 언어묘사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창2장은 에덴 동산에 대한 묘사를 시작점으로 하여 그것과 함께 종교적으로 서술되는 인간론을 진술한다. 그리고 그에 뒤이어 종교적, 신앙적인 입장에서 기술되는 히브리 정경의 모든 내용들이 순차적으로 본문에 채워진다.
이처럼 서로 차이를 보이는 두 개의 창조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통합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두 개의 창조이야기 중에서 창1장의 우주창조 이야기는 창2장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위한 무대로 기능하는 배경이다. 현재형태로 최종 편집된 창조 이야기는 그때 그 시절 동시대 히브리인들이 생활 현장 속에서 체험했던 다양한 현재적 삶의 현상과 경험을 종교적으로 설명하되, 당시의 우주관에 기반을 두고 이야기하기 위하여 당시의 수많은 자료들 중에서 선별되어 편집됨으로 현재형태의 본문이 되었다.
2. 히브리 정경의 창조이야기들은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되 종교적인 안목에서 신앙적인 관점으로 말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현재의 인간상태”를 미래지향적인 인간상태가 되게 하고 나아가 궁극적으로 미래를 향해 가게 하려는 목적에서 현재 형태로 만들어진 종교문학이다.
3. 이런 목적을 위해 취해진 히브리 정경의 두 창조 이야기들은 히브리인들의 현재적 삶을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설명하며 최종적으로는 그들이 원하는 에덴 동산같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창조주 야웨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그저 글자들의 총합으로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히브리 정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야웨 하나님의 사람들은 생명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말씀으로 기능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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