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 이해를 위한 성서와 교리 비평/교리

동성애자도 마음놓고 편히 예배드리는 교회.한국에 아직 없겠지?

YoungSoul's pen 2023. 5. 19. 15:17

의미없이 사용되는 색은 없다

 

히브리 정경에서 보는 대로 성막건조용 물품들 중에는 색이 강조되는 예물이 있다. 거기서 색채신학이라는 시각을 갖고 회막공동체를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색채신학 교회론"을 말할 수 있다.
 
출25:4~5는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 노예들이 광야에서 지은 이동식 성소에 어떤 색깔들이 사용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사용된 색상은 네 가지로 청색, 자색, 홍색, 적색이다. 홍색도 빨강이고 적색도 빨강이지만 홍색은 밝고 선명한 색상이며 진홍색이라고 표현될 때에는 밝음의 정도가 높고 선명도가 높은 빨간색을 나타낸다. 새빨간색이라고 강조될 수 있다. 연분홍이라고 말할 때의 홍색은 밝은 빨강이지만 하얀색으로 인해 빨간색이 약해진 빨강을 가리킨다. 적색은 이와 달리 통상 검붉다고 표현되는 짙은 빨간색으로 검은색이 감도는 빨강을 가리킨다.  
 
 
그러면 성막에 사용된 네 가지 색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색채를 통해 나타내는 종교적, 신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런 색상이 사용된 회막을 드나들 때의 종교적 감정과 신앙적 감성은 어떻게 기술될 수 있는가? 종교목적의 신앙적 표현물에 사용되는 색채가 갖는 종교적, 신앙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학술적 사고를 “히브리정경의 색채신학”이라고 부르면서 히브리정경을 적극 반영해야 하는 성서적 교회는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하는지를 숙고해 보고자 한다. 
 
 
푸른색 개념의 성막교회 공동체
 
성막에 사용되는 색채 중 가장 먼저 거론된 색상이 푸른색이다. 푸른색은 통상 세계적으로 하늘과 바다를 가리킨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이다. 물론 구체적으로 따져 보면 하늘과 바다의 색이 푸른색 하나로만 통일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세계 공통의 색상 관념에 의하면 하늘과 바다의 색은 푸른색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란색이다. 
 
따라서 성막에서 사용되는 푸른색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지금 성막에 계신다”를 나타낸다. 성막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땅에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로 옮긴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과 만나는 곳이 성막이며 택함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기 때문에 회막이라고도 부른다. 
 

 

푸른색을 통해 드러내려는 종교적, 신앙적인  뜻


애굽을 나온 히브리노예들 중에는 야곱의 열두 아들계열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나온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히브리노예들 자체가 다종족으로 구성된 혼합공동체이기 때문에 광야의 회막에는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음을 전제한다. 히브리노예들이 예물을 드려 만든 회막은 사람을 차별하여 출입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성막에 푸른색이 사용된다는 것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존재는 하늘보좌를 땅으로 옮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다는 종교적, 신앙적 의미를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들을 비롯한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회적 약자의 사람들은 회막에 이어지는 그리스도교회에 출석하여 마음 놓고 예배드릴 수 없는가?
 
성서구절 몇 개를 추려내어 앞뒤 맥락과 관계없이 ‘내가 아니라면 아니다.’를 외치는 형상을 노골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자들이 있다. 노예출신이 세웠다는 광야의 회막은 이미 그 자체로 다종족, 다문화를 염두에 두고 그들을 포용하면서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광야의 성소로 건조되었다. 
 
이때 사용된 푸른색은 모든 것을 품는 하늘 하나님의 포용성을 표상한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인간이고 뭐고 모두 다 푸른색으로 상정되는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푸른색이 나타내는 하늘개념을 온전히 담고 있는 성서적인 교회는, 광야의 회막 출입에 제한이 없었던 것처럼 교회출입에 제한을 두면 안 된다. 제한을 둔다면 그것은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을 만나려는 하나님의 거처가 아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종교권력자의 권력을 키우는 밀실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 좀 갖게 되면 이상하게도 겸손했던 인간존재마저 느닷없이 신의 경지에 오른 것처럼 선택된 존재라는 구별성을 빌미로 타인을 차별하는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의 뜻이 창조주의 뜻인 것처럼 은연중에 차별행태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인다. 
 
기독교인들 중 일단의 강경 근본주의, 돌비석 같은 쐐기박이 문자주의들은 교회에 올 수 있는 인간존재를 성서구절을 빙자하여 제한한다. 이런 인간은 이래서 안 되고 저런 인간은 저래서 안 된다고 신 놀음한다. 본문이 기록되었던 시대적 특성을 감안하지 않고 문장을 일반화시켜 히브리노예들이 만든 회막에 이어지는 그리스도교회를 귀족들만 들락거리는 교회로 만드는 자들도 있다. 대체 그런 교회를 다니는 교도들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가?  
 
 
회막에 사용된 푸른색 개념과 색채신학 성막교회 공동체론
 
히브리노예들이 광야에서 건조한 회막에 푸른색이 사용되었다는 것의 종교적, 신앙적 의미를 그리스도교회에 연결시켜 숙고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회는 모든 사람을 담아야 한다.  모든 사람, 어떤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모두가 다 푸른 하늘 아래 있는 것처럼,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지 가리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사람은 언제든지 편한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차별없는 교회여야 한다. 
 
그런데 광야의 회막에 푸른색이 사용된 색채신학의 의미와 전혀 상관없이 힘을 내세워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들이 교회사 속에 늘 있어왔다. 그에 따라 세상에서는 사람을 차별하는데, 그런 세상조차 기꺼이 품어야 할 교회에서도 출입에 제한을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행태를 보인다.
 
이런 따위의 반지성적, 반성서적, 비신앙적 행태는 최후심판의 때에 심판주가 이르러야 바뀔까? 지금까지 교회사 2000년이 지나도록 바뀐 것이 없는데? ​

실천되지도 않는 성서본문을 읽으면서 한숨만 나온다. 앞장서서 실천해야 할 자들은 말하길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무한은총이므로, 행함을 말하는 것은 "행위구원"이다를 운운하면서 꼼짝도 않는다. 

 

그들에게 '행함'은 루터이후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 하찮은 것이겠지. 이러니 교회밖, 예수밖의 사람들의 눈에 믿음공동체의 존재이유에 대해 회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교회 안에서 자기들끼리 장단맞추는 놀이공동체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