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라지고 있는 이 나라의 기독교.... 기독교....
참으로 안쓰럽기 그지 없으나 그동안 뿌린 대로 걷는 것일 테니 받아들일 밖에.
이 나라에 예수가 소개된지 얼마나 되었나?
천주교 전래 240년(천주교의 유서깊음을 강조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의 왜놈 천주교인들을 들먹거리며 그 관계성을 통해 한국 천주교의 전래시기를 늘려보려는 자들이 있다. 그들이 이 나라에 쳐들와서 제대로 된 방식의 선교라도 했다는 것인가?),
개신교 전래 140년.... 기독교는 이제.... 세상을 지배하고 신의 위치에서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시절 좋은 때를 뒤로 하고 이제는 서서히, 그리고 조용히 이 땅에서 사그라지고 있는 중이다. 이러다가 얼마쯤 후에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없어지고 말겠지.
신구교를 막론하고 기독교가 저물어가고 있는 이유
신구교 둘 모두 이 나라에 전래된지 300년도 못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을 향해 둘 다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더 이상 기독교가 이 나라에서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기독교는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는 종교가 되었기에 그 운명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는 처음에 약자의 종교로 출발했다. 다른 종교에서나 사회일반의 다른 영역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숱한 수의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특별하게 기능한 독특한 역할이 있었다. 그때.... 약자들은 “빛이 되라”는 구호에 대해 정열적인 희망을 갖고 예수를 믿는 믿음생활을 했다. 그로 인해 긍정적인 의미에서 기독교는 세상에서 약자들을 위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종교적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황제를 등에 업고 “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비추는 위치”에 오른 이후,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그 기능에 충실해야 하는 일에는 더 이상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소금의 역할과 기능은 낮고 천한 위치에서 자기를 녹여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자기희생적인 일이기 때문에 강자가 된 이후 더 이상 그런 일을 하려고 들지 않게 되었기 때문일 터이다.
종교강자가 된 뒤로 기독교 종교강자들은 강자의 위치에서 권력의 맛을 본 이후 저 옛 시절 자신이 매우 허약한 약자였던 때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동등의 입장이 되어 같은 모습을 갖고 세상을 사랑하는 신적 품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기독교 사상을 세상지배의 원리로 삼고 하나님의 아들을 내세우면서 기독교를 지배자 이데올로기로 변질시켰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고 복받았다고 자청하는 자들은 모두 빛의 위치에 올라 남들의 눈에 우러러 보이는 곳에 있길 원하게 되었다. 남들이 우러러 보는 높은 자리, 영광을 받는 범접하기 어려운 자리에 앉아 예수의 이름으로 천하를 지배하려는 욕심에 한껏 몰두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며 남 섬기는 본을 보인 예수의 겸손은 온데간데 없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종교를 통해 빛의 위치에 오르게 된 종교강자들은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낮고 천한 곳으로 내려가기는 커녕 하늘보좌에 앉아 있는 신의 위치에서 종교권력자의 기쁨을 누리려고 할 뿐, 힘겹게 살아가는 약자들을 위하여 소금의 역할을 하려는 하나님의 아들, 성서에서 보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모습을 보이는 종교강자는 더 이상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마침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가 전래되는 곳이면 그 곳이 어디이든지 간에 하나같이.... 침략자, 정복자,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서서, 남들 보다 한 단계라도 높은 곳에 이르러 다른 사람들을 종으로 부리는 맛을 갈구하며 그 맛을 보기 위한 일념에 심취하게 되었다. 일컬어 성공신화라고 불리는 빛 되기 스토리가 이렇게 해서 퍼져나갔다. 그것이 사업에 성공하여 남보다 많은 경제적 힘을 얻는 부자되기 스토리로 대체되기도 했다.
기독교가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이유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기독교가 지배자 이데올로기로 기능할 것이 기대되지 않게 되었다. 그 동안 침략자, 정복자, 지배자의 원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침략 이데올로기, 정복 이데올로기,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역할을 했던 기독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지금까지 침략, 정복, 지배의 구조를 통해 그것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던 기독교는 현금의 시대 속에서 더 이상 필요 없는 저 옛날의 ‘강탈문화’ 원리, 강자논리에 따라 일방적으로 시행된 ‘약자척결’의 죽은 이데올로기로만 남게 되었다.
그 좋은 예로 북유럽의 침탈종족이었던 바이킹의 후예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침략, 정복, 지배 이데올로기로 사용했던 기독교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킹 족의 침략근성이 그 후예들에게서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비폭력적으로 남의 나라 인권문제를 지적질하는 침략종족의 후예다움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노략질하면서 이유없이 이웃종족을 쳐죽였던 선조들의 만행을 이제 살만하게 되었다고 평화를 사랑한다면서 반성하는 것일까? 사형제도를 없앤 이후 그들은 국가가 그 백성을 죽이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면서 남의 나라 사형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비무장 침탈근성을 드러내며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며 침략질하던 것 대신 이제는 예수의 이름 없이 인간의 인권과 세상의 평화를 내세운 비무장 침탈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하게도 무기를 들고 쳐들어갈 때 사용했던 저 옛시대의 침략 이데올로기로서의 기독교를 헌법개정을 통해 국교로 삼지 않게 되면서 기독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류애적 사랑과 평화, 그리고 평등성을 기독교 없이 나누려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기독교 쇠락의 근본적인 이유도 모르고 성경대로 해야 한다는 무지한 자들
그런데도 이런 와중에 시대를 읽지 못하고 아직도 전국복음화니, 도시 성시화니 등을 운운하면서 중세 카톨릭의 교황청 시대를 애타게 갈망하는 개신교 목사들이 있다. 그들은 사회적 약자들을 쪽내고 자신들의 하위 인생으로 쳐내기 위해 집단적으로 약자들을 패대기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떼거리 문화를 창출하고자 패거리 시위를 통해 힘을 과시하려고 애쓰는 안쓰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자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성경에 따라 저들에 대해 이렇게 해야만 한다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셨다”고 말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독교 망한다”며 읍소하는 모습이 마치 중세 카톨릭의 교황청 권력을 몹시도 갈급해 하는 것으로 보여 처량하기 그지 없을 정도이다. 조만간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질 기독교의 끝자락에 대롱거리며 매달린 모습으로 그려져 마냥 가여울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게 사회적 약자를 상대로 집단 패거리 문화와 같은 떼거리 시위를 해보려는 짓은 결코 “성경대로 하는 거룩한 일”이 절대 아니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소수인 ‘나와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지난날의 중세 종교강자들이 향유했던 몹쓸 짓을 그대로 흉내내어 적용해 보고 싶어서 안달하는 시대착오적인 안쓰런 짓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면
그러므로 수명이 다 되어 사그라져 가는 기독교에 천착하여 최후의 순간까지 발악하는 안쓰런 모습을 벗어던지고 중세의 종교권력자들이 해대던 종교강자 놀음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언젠가 평안히 잠들 때를 위하여 지금 조용히 기독교의 근본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늘 입벌려 떠벌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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